이야기의 큰 전개는 그런대로 재미있는 편.
우주와 외계인에 대한 지구인들의 낙관과 호기심에 찬물을 끼얹는 멋진 설정인 듯. 지구인들이 암흑의 숲에 있는 순진해 빠진 어린아이라니.

반면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묘사는 중국 정서 탓인지 몰라도 어딘지 좀 단순하고 극적인 느낌이 강하달까.. 면벽 프로젝트라니. 그리고 삼체세계의 항복장면과 이후 급 '사랑최고~!' 하고 나오는 부분은 예상은 했지만서도 양상이 좀 당황스러울 정도로 극단적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버프가 상당히 커서 어떨 때는 조금 거부감이 들 정도기도. 결국은 단 한 명의 중국인이 세계를 멸망에 처하게 하는가 하면, 그로부터 사사받은 또다른 단 한 명의 중국인이 다시 세계를 구원한다. ㅎㅎㅎ

뤄지가 면벽프로젝트를 활용해서 사랑을 하고 가족을 꾸리고 하는 과정은... 작가는 아름답게 그리려 노력한 듯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한 과정이기도 해서. 이 작가가 그리는 여성들은..1부의 주인공이었던 예원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어딘지 장식품스러운 데가 있어서 거부감이 들 때가 있다.

2부는 어떻게 보면 수미쌍관 구성인데, 친절한 작가 답게 여기저기 구구절절 힌트를 많이 남겨 주어서 결말을 예상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던 듯.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역시나
면벽자가 파벽자와 대면해서 파벽당하는 장면. 그리고 삼체의 물방울이 우주함대를 괴멸시키던 장면이 아닌지.
우리편이 당하는데 그렇게나 신이 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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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작의 두 번째.
인간에 대한 모든 기대를 잃은 예원제가, 생존에 혈안이 되어 있는 냉혈한 삼체인들을 태양 안테나를 통한 통신으로 불러들이고, 인류가 우주로 나가기 위한 기술발전을 지탱해 줄 기초물리학을 삼체인들이 지자들이 미리 보내 봉쇄한 이후의 이야기다. 대충 네 흐름으로 나눌 수 있으려나.


하나는, 면벽 프로젝트의 발족.
인류는 생존을 전전긍긍 물색하기 시작하고, 절망적인 가운데 삼체 외계인들이 숨겨진 의도를 읽어내는 기술이 더럽게 없음을 바탕으로 전복을 꾀한다. 전세계적으로 뛰어난 몇몇을 물색, '면벽자'라 칭하며 그들이 머릿속으로 은밀히 계획한 생존방안을 제한없이 지원해주기로 한 것이 그것.
그러자 삼체 외계인들은 지구인 추종자들을 파벽자로서 내세워 면벽자들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함으로써 격파하도록 지시한다.

한편, 군에서는 우주전쟁을 염두에 두고 개편이 이루어진다. 군 내에서 심리적 무력감이 위험할 정도로 확산되는 중이나, 단 한 사람, 삼체인과의 교전에서 확고한 승리를 확신하는 젊은 장교, 장베이하이란 인물이 눈에 띈다.


두 번째. 면벽 프로젝트의 무력화와 동면.
면벽 프로젝트는 세 가지가 발족되었으나 단 하나를 제외하고 파벽자들에 의해 철저히 무력화된다. 심리적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한 멘털 스탬프, 항성형 수소폭탄. 이것들을 고안한 면벽자들이 파벽자에 의해, 그들이 실상 완전한 패배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동귀어진을 고안해 내었다는 의도를 발각당한 것.
파벽되지 않은 단 하나의 면벽자는 중국인 뤄지로, 그 자신 왜 뽑혔는지 모르겠다는 인물. 한때 예원제로부터 우주사회학을 전공해 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 자다. 희한하게도 지자들이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UN이 확인하게 된 탓에 면벽자가 된 케이스.
면벽자 지정 이후 독특하게도 은자적이고 사치스런 행보를 보인 탓에 무시당하고 비난받던 차였으나(걍 모든 것을 무시하고 면벽자 예산으로 이쁜 마누라 얻어 토끼같은 내새끼와 그림같은 곳에서 잘 먹고 잘 살자는 듯한, 실제로 그런 의도였음) 일이 이렇게 되자 UN 측에서는 그의 가족들을 강제동면시키고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그를 닦달한다.
뤄지는 울며 겨자먹기로 대안을 물색. 과거 예원제와 만나 우주사회학에 대해 논했던 것에서 착안해 그가 내놓은 마지막 대안은 황당하게도 '저주'인데, 구체적으로는 187J3X1항성이 거느린 행성을 향해 안테나로 저주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 그리고 저주가 실현된 것을 관측할 수 있는 시기까지 그는 동면에 들어가기로 한다.

한편, 우주군 소속 장베이하이는 수백년 후 삼체인들과 맞닥뜨릴 우주함대의 추진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후지기 짝이 없는 로켓이론에 집착하던 늙다리 학자 몇을 은밀하게 암살한다.

마땅한 묘안이 없는 상황에서, 뤄지와 장베이하이를 비롯한 많은 인구가 동면을 선택한다. 기초과학은 새로운 발견이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기존의 이론에 기대어 지구궤도 엘리베이터가 착착 건설에 들어간다.


세 번째는 삼체인의 침공.
동면한 뤄지가 깨어나, 삼체인의 침공을 몇 년 앞두지 않은 미래.
인류의 대부분은 침공에 대비하여 지하를 거점으로 생활하고 있고, 기술의 발전은 얼핏 굉장해 보인다. 우주군은 병력도 규모도 상당히 커진 상태이며, 많은 지구인들이 삼체인들을 능히 패퇴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낙관적인 상황.

그러나 최첨단 안테나를 통해 삼체인들의 우주선이 우주먼지를 흐트러뜨린 흔적을 발견해내고, 삼체인들이 보낸 은빛의 물체가 당도한 이후, 그 낙관은 깨져버린다. 지구의 기술은 지자에 가로막힌 이후 가능한 한계 내에서 최절정에 달하였으나 삼체인들의 기술은 그를 아득히 능가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을 반사하면서도 아무리 확대해도 매끄러움을 유지하는 표면을 지닌 은빛 물체. 그 물방울을 닮은 물체는 기존 물리법칙을 무시한 움직임과 속력으로, 도열해 있던 우주함대열을 관통해서는 우주함대 전체를 괴멸시켜 버린다.
개중 단 세 대의 우주선만이 탈출에 성공하는데, 그를 이끄는 것은 과거에 완전승리를 확신하는 듯 했으나 실상은 완전패퇴를 확신한 상태로 동면에 들었다가 깨어난 장베이하이다. 현 우주군의 추진력을 향상시키고자 과거 암살까지 강행했던 것은 추적이 아닌 줄행랑을 위한 것이었던 셈.

삼체인들의 공격을 최대한의 속력으로 피해 달아난 우주선 셋은 사실상 완전히 지구로부터 떨어져나온 새로운 인류가 되었으며,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타 은하계의 행성을 향해 대를 이어가며 생존을 위한 가망없는 비행을 하게 된다. 그마저도 연료 부족과 부품 노화로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직면하자, 장베이하이는 우주선 한 대만을 남기기 위해 자폭을 택한다.


네 번째. 뤄지의 계략.
지구에서는 종말을 앞둔 혼란으로 엉망이다.
뤄지는 동면에서 깨어난 이후 끊임없이 지자와 삼체 추종인들의 암살시도를 겪던 차에, 과거의 저주가 실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로써 그는 급작스레 마지막 희망으로 부상하고, 면백프로젝트는 오랜 텀을 깨고 재개된다.
그러나 뤄지는 이후 인공우주진운을 만들어내는 설원프로젝트에 오래도록 관여하는데, 당장의 구원을 바라던 많은 이들은 급속히 실망하게 되고, 그는 경멸당하기까지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원제의 무덤을 찾아 그곳에서 삼체세계와의 1대1 협상에 돌입하고, 심지어 성공하기까지 하는데, 예전에 성사된 그의 저주를 삼체세계로 옮기겠다고 협박한 덕분이다.
설원 프로젝트로 그림 형태의 진운을 만들어 삼체세계와 태양계를 우주에 폭로하겠다는 것.

과거 예원제는 우주사회학의 공리에 대해 뤄지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
첫 번째-생존은 문명의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
두 번째-문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되지만 우주의 물질 총량은 불변하다.

예원제의 공리를 바탕으로 그가 도출해낸 것은 암흑 숲 속에 적대적인 사냥꾼들이 서로를 불안해하며 우글거리듯, 우주 또한 매한가지 양상이라는 것.
발달한 문명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상대가 자신에게 우호적일지 모르는 상황이다보니 서로의 위치를 알게 되면 무조건 쏴 죽이려는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저주로 인해 187J3X1항성계가 소멸한 것도 그 때문인 것.

삼체세계가 태양계와 함께 자멸하고 싶지 않다면, 위치를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뤄지는 자신의 심장과 진운을 일으키는 항성급 수소폭탄을 연결해서 자살협박을 했고, 그는 성공했다. 이로써 삼체세계와 태양계의 지구는 서로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고, 지자의 감시는 사라지고 과학기술을 전수받게 되었다. 당분간은 평화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뤄지 역시 가족들과 재회해서 행복한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삼체세계와 그가 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주라는 암흑의 숲에 햇빛이 비치는 것이다. 서로를 불신하고 당장 파괴해야 할 위협으로 간주하는 현 상황에, 사랑과 신뢰를 싹틔울 수 있게끔 모험을 해 보는 것은 어떤가. 하고,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Posted by 에크멘
,

동아리에서 책을 사준다기에 가격대에 맞춰서 고르고 골라 구입.
김보영 작품 중에 이런 소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여튼 잠시 잊고 있다가도 신작이
나오면 어떻게든 읽게는 되는 듯한 작가.

팬을 위한 글이라고. 이 글을 읽으며 결혼식을 진행하셨다는 모양.

Posted by 에크멘
,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단편선 번역이 새로 나왔다기에 벼르다가 지름. 아무래도 이 작가도 번역이 되는 족족 찾아 읽게 될 듯. 이번 주말에 스티븐 킹 단편선 다 읽고 나면 이어서 읽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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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표지에 페미니즘 SF, 라고 크게 적혀있다. 나야 망설이지 않고 질렀지만.
최근 인터넷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여성들만 페미니즘 서적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할 때가 있다.
작품들에 대한 인상은 "체체파리의 비법"과 비슷한데, 여기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나는 듯.

희망에 찬 아기자기하고 씩씩한 모험, 지난하고 고통에 찬 저항, 끝까지 쥐고 가고자 하는 굳은 신념, 고아한 정신들이 그저 오래 기억되지 못할 숭고한 한 때로 스러져 가는 허무. 인간에 대한 조소, 비참, 절망. 그런 정서가 담긴 단편들이랄까. ㅎㅎㅎ

아주 매력적이다. 묘하게 공감하고,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삶을 종종 비극적으로 보게 되곤 하는 입장이라면 상당히 매저틱하게 즐거울 것이라고 확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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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게 되는 결말을 지닌 단편들인데. 상당히 매력적이다.
귀차니즘이 좀 잠잠해질 때 하나 씩 여기 적어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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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page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그녀의 날씬하고 강인한 다리 한 쌍이 '인디언 걸음'으로 그녀 몸을 실어 날랐다. 신선한 비에 충만한 밤, 그녀의 기분은 이제 구석구석 상쾌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하고 지칠 줄 모르는 자신의 몸을 사랑했다. 물론 배달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 달빛으로 빛나는 이 근사하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젊고 건강한 몸으로 밤길을 거닐다니.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발걸음도 가볍게 타박타박 걸었다. 여보시오, 자매님들! 편지나 소포 없나요?
...
(p.128)
그녀는 길목에 있는 건물 잔해를 쏜살같이 비집고 통과하면서, 이 아름다운 자매에게 기쁘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빛이 가득했다.
"어디로 가세요? 산책을 나왔나요? 저는 배달부예요." 그녀는 자매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설명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친구가 사방 천지에 있었다. "편지나 소포 없나요?"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평화롭게 서 있는 낡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들을 피해, 함께 성큼성큼 걸어서 옛 도로의 중앙분리대를 따라 내려갔다. 길 한쪽에는 구부러진 이정표에 '댄 라이언 고속도로, 오하이오 공항'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쪽으로, 디모인까지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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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여자들-
"밤중에 나다니는 여자들은 미친 거지. 왜 밤에 나가서 봉변을 당하는거야."
..에 대한 직접적인 조롱이자 자기파괴적인 단편?ㅋㅋㅋㅋ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작가는 "그래. 밤에 다니는 미친 여자를 그려볼까." 그랬을까?
근데 미친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가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지 보면..
왜 밤에 두려움에 떨고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지. 미치고 팔딱 뛸 것 같아 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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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page

"내가 말해주려는 건 말이야, 이건 함정이라는 거야. 우린 초정상 자극에 맞닥뜨렸어. 인간은 이계교배 생물이야. 우리 역사 전체가 이방인을 찾아내서 임신시키려는 길고 긴 충동이야. 아니면 이방인에게 임신당하거나.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마찬가지니까. 다른 피부색, 다른 코, 다른 엉덩이, 뭐든 간에 남자들은 그 다른 것과 성교를 하든지 시도하다가 죽어야 해. 그건 내재된 충동이야. 그리고 그 이방인이 인간이기만 하면 잘 돌아가지. 수백 년 동안 그런 방식으로 유전자가 순환했어. 하지만 이제 우린 뒤엉킬 수 없는 외계인들을 만났고, 시도만 하다가 죽기 직전이야.... 내가 내 아내를 만질 수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이봐. 새에게 자기 알처럼 생겼지만, 더 크고 더 화려한 가짜 알을 주면, 그 새는 자기 알을 굴려서 둥지 밖으로 버리고 가짜 알을 품는다는 거 알아? 그게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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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어나 보니 나는 이 차가운 언덕에 있었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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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page...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무자비하게 구체화하는 힘이 더욱 높이 솟구치며 어렴풋이 불쾌한 존재감을 일깨웠다. 먼지 속의 실체 없는 동요가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다만 그것은 차가운 바윗덩어리를 유령처럼 감싼 죽은 생명의 막에 두드러진 결절 같은 형태였다. 도달할 수 없이, 고립되어...그는 다른 존재에게 접촉해보려다가 엄습하는 새로운 두려움에 소스라쳤다. '저들도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까?' 고통이 진정으로 우리의 신경에서 가장 격렬한 불이었던가? 고통만이 죽음을 넘어서까지 그 불길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은, 환희는 어떻게 되고? 여기에 사랑이나 환희는 없었다.
그런 확신이 밀려들자 그는, 이전에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았던 그는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지상의 모든 고통이, 무효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 스탈린그라드와 살라미스에서, 게티즈버그와 테베와 됭케르크와 하르툼 전투에서 망가진 영혼들은 영원히 절뚝거린단 말인가? 라벤스브뤼크와 운디드니에는 아직도 학살자의 공격이 떨어진단 말인가? 카르타고와 히로시마와 쿠스코의 망자들은 여전히 불타고 있단 말인가? 유령이 된 여인들이 오직 다시 한 번 강간으로 고통받고, 다시 한 번 아기들이 살해당하는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깨어난단 말인가? 모든 이름없는 노예가 아직도 강철의 아픔을 느끼고, 한 번 날아갔던 모든 폭탄과 탄환과 화살과 돌은 아직도 비명을 지르는 목표물을 찾아 날고 있단 말인가.... 끝도 위안도 없는 잔학 행위가, 영원히 계속된단 말인가?
...
(p.430)
'우릴 죽게 해줘!' 하지만 붕괴해가는 그의 정체성은 저항을 더 버텨내지 못하고, 그저 그게 사실이라는 것만, 견딜 수 없게도 모두 사실이라는 것, 이 모든 일이 전에도 행해졌고 다시 행해질 것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다시, 또다시, 영원히 되풀이되리라. 자비 없이.
그리고 무너져내리는 층들을 뚫고 가라앉으면서 그는 오직 절망밖에 붙들지 못했다.
...외계 생명이 그들을 버리자 다들 최후의 암흑을 향해 가라앉고, 또 가라앉고... 그러다가 이해할 수 없는 비탄과 더불어 실재하는 마지막 한순간 그는 그 자신이, 혹은 그 자신이었던 배열이 새벽, 자갈 위에 부츠를 딛고, 손은 녹슨 픽업트럭에 얹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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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연기는 언제까지나 올라갔다 中-

윤회와 영겁의 고통..뭐 그런 게 생각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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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page...
그는 미소를 짓다가 뺨이 자갈에 찔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길 아래 깔린 황갈색 자갈에 뺨을 대고 누워있는 모양이었다. 외계의 공기가 타는 듯한 목구멍에 도움을 줬다. 그는 계속 그 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저 푸른 라일락 빛깔은, 저건 하늘일까? 티 하나 없이 매끈했다. 구름도, 새도 없었다.
저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들판? 이 마법 같은 통로는 무슨 용도일까? 길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초공간장?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존재는 없었다.
다이얼 표면 위쪽으로 시선을 올리니 투명한 한 쌍의 나선 같은 장치가 보였다. 한쪽 코일에는 번쩍이는 액체가 가득했다. 다른 한쪽 코일에는 그저 번득이는 불꽃 맻 개만 있었다. 그가 지켜보는 동안 빈 코일의 불꽃 하나가 꺼지더니 액체가 가득한 쪽 코일이 깜박거렸다. 이어서 또 하나가 꺼졌다. 그는 지켜보며 생각했다. 간격이 규칙적이다.
그러니까 저건 시간을 재는 장치였다. 에너지 저장량을 표시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거의 끝이 가까웠다. 마지막 불꽃이 꺼지면 문이 사라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문은 여기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린 걸까?
양 몇 마리, 반쯤 죽은 토착민 하나 정도나 받아들리면서, 클리본 산의 짐승들이나 맞이하면서.
이제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 오른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왼팔과 다리는 무거운 짐 뭉치나 다름없었다. 그는 몸을 질질 끌고 거의 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기어갔다. 1미터만 더 가면...그러나 이제는 팔에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끝났다.
어제만 산을 올랐더라도 좋았을 것을. 스캔을 하는 대신에 말이다. 스캔은 물론 비행기가 클리본 산 주위를 돌면서 시행했다. 하지만 여기 이 길과 문은 비행기로 볼 수가 없었다. 그때는 여기에 없었으므로. 이 길은 뭔가가 저 아래 첫 번째 장벽을 가동시키고, 두 장벽을 다 밀고 올라올 때만 존재한다. 아마도 산을 오를 의지가 있는 커다란 온혈동물이 올 때만.
'컴퓨터는 인간의 뇌를 해방시켰지.'
그러나 컴퓨터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직접 클리본 산의 바위를 기어오르지 않았다. 오직 의문을 품을 만큼 멍청하고, 돌 위에 엎드려 악착같이 지식을 구할 만큼 멍청한 사람만이 여기에 왔다. 위험을 감수하고, 경험을 하고, 혼자 남은 사람만이.
값싼 방법이 아니었다.
빛나는 배는, 그 우주선 안에 갇힌 성간 과학자들은 가버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에반은 이제 발버둥 치기를 그만뒀다. 그는 가만히 누워서 외계 시간 장치의 끄트머리에서 빛나던 불꽃이 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곧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소리라고 할 수도 없는 희미한 소리와 함께, 빙하가 오기 전부터 클리본 산에서 기다렸던 길과 그 길에 딸린 장치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그 길이 사라지자 바람이 다시 격렬해졌지만, 그는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아주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그 얼굴과 몸의 뼈가 언젠가는 클리본 산의 빈 바위에 흩어진 금빛 자갈과 뒤섞이게 될, 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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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잃어버린 길을 따라 여기에 왔네 中-

강렬한 허무감. 아주 인상적이었음.
삽질들이 모이고 모이고 모여서 맞이하는 발견과 발전의 역사?를 시사할 수도 있겠고. 과학적인 것, 기계에 대한 맹적인 신뢰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겠고.
아무튼 굉장한 단편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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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page

"너...익었어?"
그의 마음속에서 부드러운 틈이 생겼고, 그 갈라진 틈 사이로 자시느이 겁에 질린 덩굴손같은 마음 줄기가 뻗어 나가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는 미끄러지며 깜깜한 밝음 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광대한 비공간이었다. 거기에는 은하들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유령 같은 목소리들이, 쫓을 길 없이 표류하는 사상의 실마리들이 떠돌았다. 시간을 잃어버린 그 광대함 속에서 떠도는 뭔가가, 비존재의 바람에 실린 실체 없는 에너지의 섬세한 그물망 같은 것이 그를 살살 끌어당겼다. 생명? 이건 죽음의 생명 같은 건가? 그것이 그를 끌어당기고 또 끌어당겼다.
아니야! 아니야!
겁에 질린 그는 자신을 다잡았고, 깨부쉈고, 싸웠다. 그는 헐떡거리며 노이온의 가지 아래 네 발로 엎드린 채 현실로 돌아왔다. 빛과 공기. 그는 숨을 몰아쉬며 흙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그는 자기 자신이 끊어버린 연결선을 찾아 마음속을 살폈다. 연결선은 거기 없었다.
"맙소사, 그건 네 불명성인가?"
노이온은 아무 말 없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그것의 기운이 빠졌다는 걸 알아챘다.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한 차원을 열었던 것이다.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를 초대하기 위해.
그때 그는 이해했다. 그의 세 번째 소원,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것일 수 있었다.
그는 해가 아래쪽을 향해 달리는 동안 자신을 둘러싼 생명의 소리들도 듣지 못한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혼자, 다 벗어버리고 간다... 간다, 혼자... 그 목소리들은 뭔가 의미가 있었을까? ...간다. 영원히, 그 기묘한 상태를 만나기 위해... 혼자 간다. 나의 실재가, 나의 진정한 자아가 혈통과 자식 생산과 돌봄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져서....
그런 생각이 희미하지만 달콤한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았다. 간다. 혼자, 자유롭게.... 사람의 본심에 담긴 다른 목소리. 그의 가장 인간다운 부분이 한구석에 품은 가장 깊은 갈망. 종의 폭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영원히 사는 것....
그는 하늘이 닫히는 것을, 자신의 동물적 심장에 살아 있는 피가 맥동 치며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신음했다. 하지만 그는 동물, 그것도 인간 동물이었고, 새끼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 그는 혼자 갈 수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너의 길은 내 길이 아니야. 난 내 피붙이들과 함께 여기 있어야 해. 우리, 다시는 이 얘기 하지 말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나를 도울 수 있다면, 내 새끼들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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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지막 오후 中-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단편선을 두 개로 나누어 출간한 거라고 봤는데. 이 단편선-체체파리의 비법+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을 흐르는 정서를 보면. 작가가 인류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고, 진화하는 일련의 과정-특히, 남성이라는 주류가 이루어가는 목적지향적, 번식지향적, 파괴지향적, 약육강식적인 역사를 일종의 동물종의 번성과 사멸의 번복으로 바라보는 듯한. 역겨움과 조소, 허무..랄까 진저리 같은 것들이 강하게 느껴지는 단편들이 여럿 있다. 아니..대체로 모든 단편에 담겨 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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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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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작가가 연재하는 'SF, 미래로 가는 이야기' 칼럼에 나오길래. 관심이 생김.
http://hankookilbo.com

Posted by 에크멘
,

이 시리즈에 대한 극찬은 익히 들어왔고. 여차저차하여 아무튼 손에 넣었긴 했는데. 안 읽어지네. 다 넷플릭스 때문이다...-_-
스트레인지띵스, 그레이스, 퍼니셔, 마인드헌터..보다보니 책을 잡을 새가 없군.

세계종말문학걸작선. 이었나.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SF단편선이 있는데, 거기 "소년과 개"라는 굉장히 강렬한 단편을 읽은 적이 있더랬다. 두고두고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 원작자라고 하네. 할란 엘리슨은 본인이 터미네이터 원저자라고 주장했다고도. 이래저래 뒤져보니 굉장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더라.
아무튼. 두 번째 단편 읽다가 놓은 뒤 진전이 없다. 확 몰입할만한 단편이 초입에 없었던 것도 있지만, 짬 날 때마다 요 시리즈가 넷플릭스에게 지고 있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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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세 권을 전부 갖추었다. 시리즈의 2,3권까지 읽고 1권을 남겨둔 상태.
예상했던 것만큼, 인터넷 리뷰들이 극찬하는 만큼 가독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마 한국팬들 대개는 수십년 전에 티비 시리즈나 영화같은, 다른 계기로 알게 된 작가가 아닐까 싶은데. 단편선으로 처음 접한 입장에서는 서술 방식이나 전개방식에 적응해야 하는 입장이라 그런가.

묘사 방식이 상당히 독특하다고 느꼈다. 개인적이고 적나라하고 조금은 악에 받쳐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신성모독적인 단편이 몇 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몇몇이 그랬다. 내게는 호감으로 작용했다.
디스토피아물들이 대부분.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몇 꼽자면.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자신을 개발한 인간들을 증오하는 AI에 의해 기한 없는, 다양한 지옥을 진행형으로 경험하는 이야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
천국의 비인간성에 대한 색다른 우화랄까.
"하지만 사람들이 왔다면, 그들은 지옥이 그들과 함께했음을, 천국이라고 불리던 곳이 있었음을, 그리고 모든 광기가 흘러나온 중앙이 그곳에 있었음을, 그래서 한때 그 중앙이 평화로웠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바실리스크
베트남전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고문에 의해 기밀을 누설하고 돌아온 상병이야기. 장애와 PTSD에 시달리지만 국가의 반역자로 몰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그리고 그에게 씌인 사악한 신 마르스.
-매 맞는 개가 낑낑대는 소리
뉴욕에서 실제로 일어난, 방관자들에 둘러싸여 한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단편. 도시에서의 비인간적인 삶과 만연한 범죄상을 겪으며 떨던 인간들이 자연스레 안식을 찾아 검은 미사에 동참하게 된다는, 뒤틀린 상상.
-사이영역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아무도 모르지. 그러니 이런 상상 역시 가능하겠지.
안락사당한 영혼을 수집하여 다른 행성의 다른 생물체에게 주입하는 프리랜서가 있고, 그에 의해 안식은 커녕 다른 세계, 다른 생물체의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된 한 사람.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새로운 곳, 새로운 육체로 여러 번 보내져 기대되는 행동을 하도록 요구받지만, 종교와 신성의 탈을 쓴 규칙들과 음모들을 모두 경계하고, 휘둘리지 않으며 멋대로 죽는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도록 강요받고, 또 멋대로 죽는다. 이 과정을 무수히 거치며 그는 점점 모든 생물체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태초의 신성과 가까워지고, 마침내 제멋대로인 골칫덩이 영혼의 존재를 알아차린 프리랜서의 앞에서 각성하여, 신으로서 응당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 창조된 것들의 결말을 불러온다. 모든 것의 끝.
신을 핑계로 내세운 부산하디 부산한 온갖 서열다툼, 거기 휘둘리다못해 지칠대로 지친 피로를 마침내 끝맺는 종말, 이란 느낌.
-마노로 깎은 메피스토.
육체를 옮겨다니는 괴물과의 사투. 야생종에서의 그 초인이 생각나기도 함.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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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고, 네뷸러 등 SF계의 다양한 상들을 한꺼번에 획득한 단편모음집.
'엔더의 게임' 작가로 유명한 오슨 스콧 카드가 제안한, 유토피아에 대한 단편집에 참여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특출나다고 할 만한 작품. 정작 해당 단편 모음집은 발간된 적이 없지만.

오슨 스콧 카드는 유토피아에 대한 작품을 제안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는데, Europe+Utopia->Eutopia, 즉 유럽인들에 의해 구성된 근미래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유토피아를 전제로 하며, 작품은 그곳 거주자의 시각으로 쓰여야 한다. 작품 내의 유토피아 거주자들은 언제고 그 유토피아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헤이븐'-유럽인들이 운영하는 우주왕복선 센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원래의 거주지로 돌아갈 수 있다, 는 것이 그것.

'키리냐가'는 마이크 레스닉이 아프리카 문명에 심취해 있을 때 쓴 옴니버스 단편인데, 독특하게도 케냐의 '키쿠유'족 노인 '코리바'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키쿠유족이 속해 있던 동아프리카는 19세기 영국의 동아프리카 회사가 처음 당도한 이래, 끝없는 유럽인들의 침략으로 문호를 열었다. 식민지화되어 착취당하는 과정에서 키쿠유를 비롯한 많은 부족의 문화가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멸시받으며 소멸당했고, 부족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빼앗긴 사람들은 유럽인들의 편의에 맞게 '케냐인'으로서 뭉뚱그려져 살아왔다. 24세기가 된 현재, 오랜 자원 착취와 부패로 인한 환경오염이 케냐 전체를 뒤덮고 있고, 유럽의 것을 본딴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사방에 들어 차 초원을 뛰놀던 거의 모든 동물들은 멸종된 상태이다. 공원에서야 간신히 새 같은 작은 동물들을 볼 수 있을 따름.

코리바는 젊은 시절, 예일을 위시한 서구의 명문대학들에서 박사학위를 수료한 바 있는 지식인이지만, 유럽인들에 동화되지 않고 키쿠유족으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한다. 그는 수 세기 동안 침투해 들어온 유럽인들의 법과 정치, 사상과 문화적/과학적 산물들을 현재의 삶에서 모두 배제하고, 오래 전 키쿠유족들이 살았던 방식 그대로를 고스란히 재현하며 키쿠유족의 진정한 신,'응가이'의 뜻에 따라 살아가길 열망한다.

유럽인들과의 협상 끝에, 코리바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이주하기 적합한 소행성을 하나 획득하는데, 그는 그곳에 키쿠유족이 살았으나 현재는 잊혀진 '빛의 산', '키리냐가'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는 부족의 제사장이자 마법사인 '문두무구'가 되어, 키리냐가로 이주하여 부족민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삶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로 한다. 오랜 시간 연구한 결과를 녹여내어 우화를 통한 가르침을 주는 것도 그 일환이지만, 소행성의 궤도를 수정하는 유럽인들과 음성인식 컴퓨터를 통해 소통해서 햇빛과 비를 포함한 다양한 기상현상을 '신의 이름으로' 관장하는 것 또한 그의 일이다. 염소의 배를 갈라 내장을 보거나 뼈를 던져 앞일을 점치고는, 길하면 축복하며 '비'를 내리고, 부족민들이 '응가이'의 뜻에 반해 엇나가려할 때마다 '가뭄'을 벌로 내리는 식이다.

코리바의 요청에 따라 키리나갸 소행성의 기상을 실제로 조종하는 유럽인들은 키리냐가의 운영 방식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간섭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 이를테면 코리바가 '발부터 나왔으므로 마귀가 붙었다'는 이유로 갓난아기를 키쿠유의 방식에 따라 죽였을 때, '쌍둥이 중 하나는 마귀이므로' 역시 갓난아기를 죽일 때. 유럽인들은 찾아와서 '인권'을 들먹이며 코리바의 행동을 비판하지만, 늙고 꼬장꼬장한 코리바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유럽의 방식과 키쿠유의 방식은 혼재되어서는 안 되니까. 조금이라도 유럽의 것이 섞여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은 엉망이 되고 결국 지구의 케냐와 다를 바 없는 퇴락의 길을 걸을테니까.

외부의 간섭은 결국 코리바의 고집으로 막아내었다. 유럽인들로부터 불간섭특권을 유지하는 것은 앞으로도 문제 없어 보인다.그렇다면, 키쿠유족의 유토피아는 진정 도래할 수 있는 걸까.

코리바가 원하는 유토피아는 끊임없이 위협받는데, 이야기는 이 다양한 요소들에 따라 옴니버스로 엮여 있다.

-코리바 앞에 천재적인 아이가 하나 등장한다. 지적 호기심이 넘치는 아이는 코리바에게서 글을 포함하여 코리바가 부족의 우두머리로서 기능하게 한 바탕, 유럽인들의 지식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하지만, 코리바는 아이가 여자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배움을 차단해 버린다.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는 낙담한 나머지, 자살을 택한다.

-건기로 인해 초식동물들의 수가 줄자, 먹이를 구하지 못한 하이에나들이 아이들을 습격한다. 부족장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지구로부터 사냥꾼을 들이자는 주장을 하고, 코리바는 반대하지만 결국 다수결에 따라 사냥꾼이 도착한다. 거만하고 건장한 마사이족 사냥꾼은 사람을 공격하는 하이에나를 손쉽게 물리치지만 이내 마을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행패를 부리고, 그가 즐기는 문물과 유흥거리로 마을 젊은이들을 물들여간다. 마을 사람들이 사냥꾼의 행패에 질려 그를 쫓아달라하자, 코리바는 꾀를 내어 그를 패배시키고 떠나게 만든다.

-지구로부터 새로운 부부가 도착하여 함께 살고 싶다고 하자, 코리바는 최대한 키쿠유족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조건으로 허락한다. 그러나 마을 여자들은 새로 도착한 부부 중 아내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그녀가 남자들과 대등하게 행동하려 한다는 이유로-'마나모우키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법인데!'', 지식을 갖추고 다른 이들보다 작물을 더 잘 경작한다는 이유로-'마녀 아니야?', 집에 꽃을 들여 장식하는 사치를 부린다는 이유로-작물경작에나 힘쓸 일이지 무슨 사치를!', 부족장의 아내들보다 훨씬 아름다운 옷을 만든다는 이유로-'부족장의 아내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을 빼앗는다!', 지나치게 젊어보인다는 이유로 그녀는 비난의 화살을 맞는다. 모든 면에서 새로 온 여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맞추고자 노력했지만, 불임인 그녀가 남편이 첩을 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았을 때는 코리바도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떠날 밖에는.

-부족장의 늙은 어미가 노인으로서 대접받는 것을 거부하고, '나도 일할 수 있다!'며 가출한 사건. 노인은 젊은이들에게 하던 일을 위임해야 하지만, 노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즐거움을 놓고 싶어하지 않고, 아들의 집에서 나와 문두무구만 거주할 수 있는 언덕으로 옮겨와 살려 한다. 노파를 쫓아내려 하지만 노파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코리바는 화가 난 나머지 '응가이의 뜻에 따라' 수 개월에 걸친 가뭄을 내리고,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는다.

-차기 문두무구로 삼으려고 가르치던 사내 아이, 은데미는 커 가면서 코리바 홀로 정보의 원천을 독점하고 사람들에게 전파하지 않는 데 대해 반감을 갖는다.
문두무구 업무의 핵심이 되는, 음성인식 컴퓨터를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서 은데미는 컴퓨터를 통해 역사와 과학을 비롯한 외부 문명을 더 배우고 싶어한다. 외부를 잘 이해해야 진정한 키쿠유를 일궈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굳이 고통에 찬 일상을 개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였다.
코리바는 강하게 반대한다. 키쿠유족의 정체성을 종내는 잃어버릴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둘 사이의 갈등은 조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은데미는 결국 유럽인들이 있는 헤이븐으로 가서, 지구로 향한다.

-마을 사람들도 점점 은데미처럼 변해가기 시작한다. 코리바가 나이들어감에 따라, 코리바와 함께 키쿠유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주했던 1세대 이주민들은 거의 다 죽었다. 새로운 키리냐가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마을사람들은 유럽인들이 지닌 의학적 지식을 보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어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보다 편리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코리바는 이 모든 것에 질색을 하며 새로운 키리나갸 역시 유토피아로서의 빛을 잃고 유럽인들처럼 변해 퇴락할 것이라 여긴다. 좌절한 코리바는 키리나갸를 버리고 지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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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절은 참 지독하기 짝이 없었고보면, 코리바 같은 이들이 있다고 해도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통째로 빼앗기고, 원치 않는 삶을 강요받으며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살 기회를 영영 잃었으니까.

하지만, 과거의 한 정지된 단면에서 유토피아를 꿈꾼다면 그것은 결국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지 싶다. 더군다나 그 이상향이 한 사람의 독단으로 단정지어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두뇌와 풍부한 지식을 지녔을지라도.
모두가 평등하게 인권을 누리는, 인권이 점점 신장되어 가는 삶, 편리한 삶을 위해 발전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 본연의 것이고, 특정한 이상을 좇는다는 명분으로 그것들을 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군가는 그 속에서 상처받고, 절망하게 된다.

코리바가 정보는 좀 독점하더라도 권위를 좀 내려놓고, 협의를 통해 마을을 이끌었더라면, 마을은 식민지배 전의 키쿠유를 계승하는 데 보다 근접해 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과거의 키쿠유도 그들 내부의 의견 교환을 통해 어떻게든 발전해 갔을테니까. 온전히 그들만을 위해, 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담아.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나라에서 이미 살고 있는 나는, 식민지배의 순간을 완전히 덜어내버리고 온전히 스스로 발전할 기회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게 과거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 가장 좋은 방식이 아닐까 싶은데.
하지만 이미 근방에 고스란히 베끼기 좋은 발전된 문물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숨길 수 있을지, 얼마나 배제할 수 있을지 모르고, 늙은이가 얼마나 독단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결국 결말은 예상한 수순대로. 각자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저마다 다르고, 다른 이들과의 타협 없이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재현해 내고자 한다면.
홀로 고립되는 수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

 

애들이 조금 더 머리가 컸더라면 이 책의 일부를 읽고 같이 토론해봐도 재밌었겠는데.

전통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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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대체 행성 아르테미스로 향하는 2,500여 명의 인간들이 냉동되어 있는 우주선 내부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피해자들은 우주선을 조종하고 유지하는 업무를 맡은 클론들. 수십~수백 년 묵은 이들 클론들은, 무언가 범죄를 일으켜 사형이나 구금 대신 우주선 행을 택한 이들이었고, 아르테미스까지 임무를 완성하고 나면 사면되는 것이 탑승 조건이었다. 
우주선의 생체데이터는 모두 날아간 상태고, 우주선을 운용하는 AI역시 제기능을 못하는 상태. 다행히도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가 가까스로 이들의 마인드맵-뇌를 스캔하여 전자상으로 옮긴 데이터-을 따서 새로운 몸으로 재생시켰기에, 다시 살아난 클론들은 누가, 어떻게, 왜 그들을 죽였는지 추리하기 시작한다.


이야기 자체도 스릴있고 재미있지만, 복제인간에 대한 윤리적 이슈, 종교적 이슈 등 여러가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괜찮은 책이었다.
클론이 된다면 어떤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수명, 재산, 직업, 취미, ..여섯 클론들의 과거를 통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온갖 것들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도-쓸 데 없는 일이긴 하지만 즐거웠고.
클론은 다른 사람인가, 아니면 한 사람의 영속인가..하는, 윤리적이고 법적인 문제를 소설 속에서 어떤 식으로 처리하고 있는지, 클론과 마인드맵이라는 뇌 처리 기술이 결합되면서 등장할 수 있는 범죄들로 어떤 것들이 등장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웠고.
클론 이슈가 가져올 종교적인 혼란-인간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클론 자신이 갖게 될 혼란이나 수용에 대해 가능성이나, 클론이 등장하면서 죽음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과 무게가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가, 그런 것도 다루고 있어서.

아무튼. 사고 실험 한 번 대차게 즐긴 느낌이었음.
클론의 삶은 한 분야에서 혹은 여러 분야에서 기술을 한계 너머로 갈고 닦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혹은 오래도록 그저 방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긴 하지만. 

어차피 나야 인간으로서 제한된 시간을 살 뿐인지라.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면서 다각화된 삶을 살아보려 애써야겠지.
덜 생각하고, 더 행동해야. 좀 더 재밌겠지.
혹은, 간접경험 횟수를 더 늘린다거나-단순한 게임 따위에 매몰되지 말고, 심심할 땐 역시 책을 열심히 읽어야겠어.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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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더가 막 전투학교에 들어가 이런저런 부대를 전전하며 이런저런 사람들을 접하고는 그들을 거울삼아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린 초반부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엔더가 구사하는 새로운 전략들을 바라보는 재미도 물론 쏠쏠했고.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리하는 엔더를 보는 건 괴로웠다. 아무리 희망이 없다기로서니 꼬맹이 하나에 온갖 막중한 짐을 올려놓고는 몰아붙이는 꼴이라니-비록 엔더가 무척 성숙한 인물이라곤 해도. 그래서 그를 어린아이라고 무시할 일이 아니라곤 해도. 엔더뿐만 아니라 전투학교에 있던 다른 생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버거와의 3번째 전투를 둘러싼 내막 역시 읽는 내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사실 애초에 그런 불편한 점들은 작가가 애당초 계획하고 심어둔 거고, 어느 정도 그것들에 대해 조소하고 풍자하는 뉘앙스도 찾을 수 있긴 하다. 또 우리의 비범하고 강한 주인공은 몇 번이고 흔들리긴 하지만 그 정도로 아주 망가지지는 않으며, 끝끝내 그에게 새로이 덮어씌워진 거대한 죄책감마저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해낸다. 
하지만..책을 덮고 나서도 역시 이 정도의 마무리로는 뭔가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쟁 영웅이자. 전쟁이후 평화와 안식의 기원을 전하며 전 우주적인 성인급으로 거듭난 어린아이라.. -__- 
아이라고 어른처럼 생각하지 말란 법은 없고, 어른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더 굳건히 견뎌낼 수 있을 수 있다는 작가의 얘기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래도 이건 어른과 대등한 인격적 존재를 그리는 걸 넘어서서 비범한 아이에 대한, 어른인 작가의 로망같은 것을 투영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곤 했다. 모든 걸 결국 고립되고 속고 착취당했던 사람, 최대 피해자 중 하나에게 지우고 끝난 거나 마찬가지인 결말 역시 어쩐지 아니꼬웠고 화딱지가 났다. 
책 앞쪽에는 작가가 쓴 서문이 있고, 작가는 이 책이 책을 읽는 각자의 고된 상황에 대한 대변자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과하게 추켜세워져서 고립되기 십상인 영재들이든, 매일을 훈련에 휘둘리며 부대끼는 군인들이든, ...글쎄..모르겠다. 
작가의 의도대로 반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난 이 책이 그리 달갑지 않다. 후속작으로 "죽은 이의 대변인"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엔더와 발렌타인의 행보를 그린 이야기겠지만..행여 번역된다해도 보고싶은 마음이 들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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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렸다가 갖다주고, 빌렸다가 갖다주고, 빌렸다가...의 연속이로고. -_-
언젠가는 이것도 사야지. 하지만 일단 다 읽어보고나서.
작 가가 선정한 중단편선. 초기작부터 한창 잘 나가던 때 작품들까지 여럿 실려있다. 작품마다 작가가 쓴 소개글-그 작품을 쓸 당시의 상황이나 심경-언제 어떻게 영감을 받아 집필했고, 누구에게 팔렸고, 무슨 상을 받았고, 동료 작가들에게 무슨 말을 들었고..따위가 시시콜콜하게 씌여있는데 그걸보고 느낀 건 역시 이 냥반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 집에 가는 길에 떠올린 아이디어를 집에 도착하자마자 써내려가서 완성~! 도 있고.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날은 하루 새 세 편씩 써내려가기도 하고.
신화와 문학을 포함한 인문쪽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분야에 대해서도 무수한 책을 읽은. 상당히 열정적인 독서가이고, 다양한 취미를 찾아 즐겼고, 그 경험들 모두를 빨아들여 내면화해서는 번뜩번뜩 자신만의 아이디어대로 섞고 발효해서 뽑아낼 줄 아는 비상한 머리와 재치를 지닌. 대단한 냥반임은 분명한 듯. 처음 만들어낸 기발한 아이디어를 의미있게 구체화하고 멋드러지게 적어내려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새삼 감탄을.
한 달에 한 번은 소설을 한 편 쓴다던가. 상당히 다작하는데도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자주 뽑아내는 아이디어 뱅크형 작가, 배명훈씨가 잠깐 떠올랐음. 그분도 독특한 아이디어를 완성도 높은 이야기 한 편으로 만들어내는 비상한 작가라는 인상이 강한데.

내 빈곤한 상상력과 독서량, 직관적인 것만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버린 탓인지 맹한 머리론 젤라즈니의 소설은 종종 과하게 차려진 만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풍성하고 재기발랄한 인용이나 패러디들, 종종 심도있게 등장하는 철학적인 고찰들도 나오는 족족 슥슥 빨아들일 수 있으면 보다 훨씬 즐겁게 읽을 수 있을텐데. 종종 으음..하고 거듭 읽어야 하는 과부하가 일어나서리.

게으르게 읽느라 절반도 채 못 읽고 도로 갖다줬지만 흥미로운 작품이 많았다.
' 기사가 왔다!'나 '형성하는 자' 등에 나오는 어떤 부분들은 후에 나온 앰버연대기의 설정을 벼려가는 과정을 본 것 같아 흥미로웠고. 설명되지 않은 곁가지에 대한 얘기 같기도 하고, 이게 그렇게 재구현된 건가? 싶기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ShadowJack 은 꽤 뒷부분에 실려 있지만 "그림자 잭"의 프리퀄이라고 해서 앞부분들을 건너뛰고 읽었다.시종일관 나르시시스트적인 잭은 역시 사랑스러웠다.ㅋㅋㅋ 큭큭 웃기도 엄청 웃었고.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잭이 망토를 휘날리며 그림자를 좇아, 그림자들과 함께, 열심히 폴짝 뛰고, 날아내리고, 달려가고 하며 활극을 펼치는 것이, 애니메이션 한 편을 굴리는 느낌이었다. 원작은 일러스트와 함께 발간되었다는데 어지럽게 공중을 선회하며 잭을 잡아채려는 가고일들이나 사방으로 달려나가는 그림자 분신 샷 따위를 어떻게 그려냈을지 궁금해진다.
나머지는 다음에 더.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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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김보영의 글을 더 읽을 요량으로 빌렸음.
앞서 수록된 배명훈의 세 번째 단편까지 읽고 네 번째로 넘어왔는데...이분; 나름 에로에로를 다루는 데도 소질이 있군..-_- 그러고는 능글능글 잘도 넘어간다. 아직까진 다들 소소하게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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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박애진의 글들로 넘어왔다. 
아...이 책 좋다. 
아직까진 배명훈의 단편들도, 김보영의 단편들도 정말 좋다. 
능글능글 짖궂으면서 재치어린, 그러면서도 애틋한 구석이 담긴 배명훈의 글들과-침착하고 진지하면서도 사고를 때리는 따스한 반전이 담긴, 매번 소소하게 감동을 주는 김보영의 글.
특히 김보영의 "미래로 가는 사람들" 연작 4편은..시간여행자와 관련된 것들을 다룬 이야기인데..그런 설정을 열나게 우려먹은 로저 젤라즈니의 글들도 부럽지 않을 정도.
어..젤라즈니야 지금 비교하기엔 옛 분이니 무리가 있나. 아무튼 이 연작, 정말 멋졌음.
다만 공부를 좀 더 하고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가진 얄팍한 지식도 야곰야곰 까먹어 가고 있으니..이것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게을러서 외면하고 있던 자연과학 서적같은 걸 좀 찾아 읽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나머지는 더 읽어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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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집사'가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박애진. 박애진의 글들은 앞의 두 사람의 글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그녀의 글 속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언제나 능글능글 잘도 적응하고 살아낼 것 같은 배명훈의 주인공들과도, 심지가 굳고 때론 조용히 열망을 품는 김보영의 등장인물들과도 다르다. 건조하고 차가운 세계 속에서 고독에 절어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외로워하고-온기에 홀리지만 자신의 형태를 이루는 틀을 깨고 누군가와 하나로 융합할 수는 없는. 타인과의 온전한 합일같은 거야 다같이 꿈꾸는 환상이라고 인정하는, 버석버석한 요즘 사람들이랑 닮았다고 하면-좀 그런가. 아니..등장인물들이 그렇다기보다-종종 온기에 끌려 무모해지거나 매여버리거나 미치거나 하는 인물들을 끌어가는 작가의 시선이 그런 것 같기도. 결국은 되돌아오고야 마는 버석하고 씁쓸한 삶. 체념같기도 하고 나름의 안온함 같기도 한 그런 거. 친숙한 느낌이 든다. 항상 그런 식은 아닌 것 같지만.
'선물'이 개중 가장 마음에 들었고. '완전한 결합'은 이영도의 모 단편 중 등장하는 '온가시버시' 동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생식을 위해서는 셋, 혹은 네 종류의 성이 모여야 하는 얘기가..르귄의 단편 중에도 하나 있던 것 같은데. 제목이 뭐더라.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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