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쓴 리뷰가 있길래 가져옴.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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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에서 찾은 책. 누가 신청했는지.

구구절절 공감하면서 읽고 있는데. 다 읽고나면 요약하고 정리해두겠음.

독서교육 계획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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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 정희진.

[남성성, 식민지 남성성]
여성학 강의를 드는 것은 대체로 여성들이다. 남성들이 듣고 변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실상 여성학 강의를 듣고 변하는 남성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인종, 계급, 젠더는 권력관계이기 때문. 계급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 자본가를 교육하는 방법을 유효하게 써먹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러한 변화는 제도나 물리력을 통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젠더 권력도 마찬가지. 
젠더권력이 오래되고 치열한, 정치의 최종심급이라는 사실을 전체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여성주의와 소통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젠더를 끊임없이 탈정치화하려는 사회시스템이 워낙 강력하여 제도적, 물리적 제재가 약했으며, 더욱이 남성의 변화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으로 가능할 것인양 여성들이 남녀관계에서 더 노동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젠더권력에 대해 알아보고,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남성성은 젠더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고, 어떤 문제도 남성성을 위시한 젠더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우선 남성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희진은 서구에서 남성성을 규정한 여러 여성주의 이론을 살펴보고, 서구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띄는 한국남성의 '종속적(주변적)남성성', '식민지 남성성'을 규명하고자 했다.

[남성성에 대한 여성주의이론]
서구 여성주의에서 이루어진 남성성 연구는 크게 4갈래로 나뉜다.
1. 근대 자유주의
- 신분제 사회 붕괴 이후.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과학이나 국가 앞에 평등하다는 근대 자유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여성도 인간이다.' '남성은 인간을 대표하지 않는다.' 고 주장했다. 이는 '성별'과 '인간'  개념 사이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인간은 인간 이전에 남성과 여성이어야 한다는 성 차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적 영역에서 남녀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논리는 남성을 구원했고 혁명을 중단하게 만들었다. 결국 '(공적 영역에서) 여성이 남성의 기준에 맞는 시민이 되는 것'을 지향함으로써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부터 근본적인 비판을 받는다.
2. 실존주의
 - 시몬 드 보부아르, 1949년 '제2의 성'. 뛰어난 지식인임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소외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추적함. '인간'이란 실상 '백인 남성' 이며, 중산층 백인 남성이 아닌 여성, 흑인은 인간이 아닌 '타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규명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실존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애초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제1의 성-진정한 인간-으로 길러지는 남성과, 제2의 성-남성의 소유, 부속, 기호-으로서 길러지는 여성을 조명함으로써 남성성이 생래적이지 않음을 지적했다.
3.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
-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며 성장. 이들이 가진 근본적 문제의식은, 기존 여성주의가 젠더를 공적 영역에만 한정해서 다룬다는 것이었다. 여성이 받는 교육, 경제력 등의 공적 지위는 이성애에 기반을 둔 가족제도 하에서의 노동,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 등 사적 영역의 지위와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되려 반비례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었다. 여성억압은 사적영역에서 더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가정 안의 불평등과 섹슈얼리티 억압이 주요 정치적 의제로 상정되지 않는 한,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높아서 낮으면 낮아서 차별 받는다. 이들은 사적 영역을 정치화하고, 좌파 남성들의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비판하며(마르크스주의 비판) 여성 자체가 억압받는 계층이라고 보았다.
여성폭력, 여성살해, 군 위안부 문제 등 전쟁성폭력, 몸 이론, 포르노그라피, 성적 대상화 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의 통찰은 현재 한국사회 진보 진영의 멈추지 않는 성폭력, 성차별과 정확히 일치한다.
4. 주디스 버틀러의 행위성 이론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딜레마에 탈출구 제시. 남성과 여성은 존재가 아니라 반복적 수행을 거쳐 구성되는 사회적 규범이자 임의적 범주라고 제시. 애초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실체는 없다. 행위가 있을 뿐. 때문에 주디스 버틀러는 '언어적 실천'이라는 패러다임을 확고하게 제시함. 

==남성은 인류, 인간성, 국가를 대표함. 남성성은 남성이 정해왔음. 그러나 바람직한 여성성은 남성사회가 정해주는 것. 때문에 남성은 개개인으로 식별되어 온 반면, 여성은 타자화되고 집단으로 뭉뚱그려져 왔음. 젠더 이분법은 남성성을 그 기준으로 하므로, 그 자체가 차별임. 그러나 마치 남성 집단과 여성 집단이 각각 균질적이고 독자적인 대립항인 것처럼 선전됨. 
남성성, 여성성은 동일하고 고정된 개념이 아님. 성별불문 실현은 불가능함.

[패권적 남성성]
서구에서 한 시대의 대세가 되어 온 남성성. 시대별로 권력과 부를 획득한 주류 남성들이 영위한 남성성. 대략 시대적 흐름에 따라 네 가지 분류할 수 있겠는데, 이전 시대 것을 계승하고 확장한 것이라 완벽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움. 쨌든 이들을 복합적으로 융합한 것이 시대마다 새로운 남성성으로서 각광받아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임.
1. 그리스의 시민/전사 모델. 
-군사주의+이성주의. 남성다움=시민권. 영예로운 남성 전사의 이상이 국가의 행위에 투영된 것.
2. 가부장적 유대 기독교 모델.
-책임감, 소유권, 아버지로서의 권위 등 가정 내에서의 이상 강조.
3. 영주/후원자 모델
-귀족적 이상, 군사적 영웅주의, 높은 위험(결투 등) 감수.
4. 프로테스탄트 부루주아 이성주의 모델.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성과 가장 가까움. 경쟁정 개인주의, 이성, 자기 통제, 극기와 자제력, 공적 생활에서 몸에 밴 책임감 강한 생계 부양자.

==시대마다 이러한 모델들을 재구성하고 재결합하여 남성성의 변화나 대체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남성 권력의 쇠퇴나 변질은 아니었다. '남성의 위기' 담론은 다양한 남성성 중 하나가 다른 남성성으로 교체될 때 나타나는 남성 문화의 반응으로, 젠더 이분법적인 상황에서는 이를 '여성 지위 향상'으로 이해하려 든다. 

[주변적 남성성]
돈과 권력을 획득하지 못한 비주류 남성들이 갖는 남성성. 가난한 남성, 동성애자 남성, 장애인, 학력이 낮은 남성, 병역의무를 마치지 못한 남성들은 지배적 남성성의 위계 아래 있음. 여성의 일상생활에서는 패권적 남성성보다 주변적 남성성을 경험하게 될 때가 많다.
남성 문화 안에서는 중심을 지향하거나 비굴하고 의존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여성에게는 더 폭력적이고 강한 남성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남성성을 확장하고자 하지,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려 들지 않는다. 
지배적 남성성의 자원이 사법권력, 지식, 자본 등 일반적인 권력이라면, 이들의 남성성은 폭력, 협박, 치킨게임, 낭만화된 하위문화-조폭영화 등, 여성의 모성과 연민을 자극하는 자작극 등을 자원으로 삼는다. 폴 윌리스의 백인 남성 노동자 계급 연구 등에서 볼 때, 이들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등의 분노로 승화하기 보다 당장의 남성성 획득을 위해 미래를 포기하며, 이주민과 여성 노동자를 향한 배타성, 우월 의식으로 열등감을 보상받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결국 사회의 보수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일본의 NEET족의 탈력문화, 영국 백인노동자의 루저문화 등에서 볼 때 이들은 자발적 루저로서 노동을 비롯한 공부, 연애, 관계맺기 등 조금이라도 힘이 들어가는 일은 하지 않는다. 강하지만 강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며, 피해자 코스프레에 능하다.

비주류 남성들의 괴로운 일상의 원인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에게 있으나, 이들은 여성들에게 문제를 전가한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남성 연대를 활용한다. 남성에겐 집단의 성원으로서, 모든 차이를 초월한 남성 연대라는 가장 강력한 힘의 역사가 있다. 이성애가 남성 연대를 이길 수 있다면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남성 가장들은 아내의 월급보다 남성 동료의 월급이 많기를 바라며, 성폭력 피해자가 자기 가족이라 할지라도 숨기거나, 가해자 편에 서거나, 피해자를 대신하여 합의금을 챙긴다. 남성은 상황에 따라 자신을 개인 혹은 남성 집단의 성원으로 정체화한다. 
남성은 정체성이 아닌 포지션이며, 모든 남성은 직접적인 성 차별의 수혜자이자, 잠재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 개개인의 품성, 가치관, 성찰과 무관하게.

[식민지 남성성]
제국주의 시절, 침략자들이었던 서구에서의 남성들이 독립성, 자율성과 주권, 군사주의 등을 특징으로 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압박했으며 이는 서구 페미니즘의 비판을 받았다.
반면, 식민지배를 겪었던 한국 남성들은 자국의 여성을 지키기 보다 자원으로 여기고 소모하고, 강대국이나 윗 서열 남성들에게 조공하며(미군 성범죄에 대해 미국여인을 범하자는 감정적 논리가 우세했던 사례, 군 위안부, 기생관광, 미군기지촌 성매매 합법화 사례 등을 들고 있음. 최근의 YG연예기획사 등의 사례를 봐도, 알게 모르게 흔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듯.), 한편으로는 강대국들 내지는 높은 서열의 남성들과 부대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여성의 위로와 지지를 끊임없이 갈구한다. 식민지 남성성을 규정하는 특징 10가지를 보자..
1)  보편적 주체로서 자신을 국가, 민족과 동일시
2) 성별 정체성을 국내 여성과의 관계에서 구성하기보다 외세와의 관계에서 파악
3) 강대국에게 저항하거나 이용하여야 하는 남성의 중대한 업무 앞에서 여성들이 자신과 뜻을 함께 하지 않고 평등을 외치는 것을 반민족적으로 여김
4) 여성 해방은 경제적 계급 해방이나 민족 해방 이후의 과제임
5) 여성은 강자와의 투쟁에 바쁜 자신을 대리해 생계를 책임지고, 자녀를 양육하고, 성적욕구를 해결해 주는 성역할에 충실해야 함
6) 자신이 지치면 여성은 위로와 지지와 격려를 해주어야 함
7) 자원이 부족할 경우 적의 성적노리개가 되어 먹을 것을 얻어와야 함. 이 경우 식민지 남성은 우울해하거나(이상-날개), 자존심이 상해 여자를 패거나 혐오하고, 환황녀라며 매도해 공동체에서 몰아내고(안정효-은마는 오지 않는다), 중산층 여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피해여성을 진정한 민중으로 숭배하거나(김기덕-해안선), 분노로 스스로 미침(남정현-분지)
9) 좌파 민족주의 진영은 가해국과의 투쟁에서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보다 경제적 협력이나 군사원조를 받아내는 등, 협상 자원으로 활용해 왔다.
10) 자신이 이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은 성찰이나 강자에 대한 저항이겠으나, '도리가 없'으므로 술을 마신다. 무기력, 자기연민, 고뇌하는 자기도취상태에 있다.

역사적인 흐름에서 본 식민지 남성성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양상을 띄며, 이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약소국 남성성과도 다른 특이한 양상이다. 
페미니즘은 성별 분업의 철폐를 주장하지만, 한국 남성은 성별에 따른 분업조차 하지 않는다. 여성과 직면하는 남성이 없으며 없음을 이야기하며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필요한 생존전략이 무엇일지 묻고 있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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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큰 전개는 그런대로 재미있는 편.
우주와 외계인에 대한 지구인들의 낙관과 호기심에 찬물을 끼얹는 멋진 설정인 듯. 지구인들이 암흑의 숲에 있는 순진해 빠진 어린아이라니.

반면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묘사는 중국 정서 탓인지 몰라도 어딘지 좀 단순하고 극적인 느낌이 강하달까.. 면벽 프로젝트라니. 그리고 삼체세계의 항복장면과 이후 급 '사랑최고~!' 하고 나오는 부분은 예상은 했지만서도 양상이 좀 당황스러울 정도로 극단적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버프가 상당히 커서 어떨 때는 조금 거부감이 들 정도기도. 결국은 단 한 명의 중국인이 세계를 멸망에 처하게 하는가 하면, 그로부터 사사받은 또다른 단 한 명의 중국인이 다시 세계를 구원한다. ㅎㅎㅎ

뤄지가 면벽프로젝트를 활용해서 사랑을 하고 가족을 꾸리고 하는 과정은... 작가는 아름답게 그리려 노력한 듯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한 과정이기도 해서. 이 작가가 그리는 여성들은..1부의 주인공이었던 예원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어딘지 장식품스러운 데가 있어서 거부감이 들 때가 있다.

2부는 어떻게 보면 수미쌍관 구성인데, 친절한 작가 답게 여기저기 구구절절 힌트를 많이 남겨 주어서 결말을 예상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던 듯.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역시나
면벽자가 파벽자와 대면해서 파벽당하는 장면. 그리고 삼체의 물방울이 우주함대를 괴멸시키던 장면이 아닌지.
우리편이 당하는데 그렇게나 신이 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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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작의 두 번째.
인간에 대한 모든 기대를 잃은 예원제가, 생존에 혈안이 되어 있는 냉혈한 삼체인들을 태양 안테나를 통한 통신으로 불러들이고, 인류가 우주로 나가기 위한 기술발전을 지탱해 줄 기초물리학을 삼체인들이 지자들이 미리 보내 봉쇄한 이후의 이야기다. 대충 네 흐름으로 나눌 수 있으려나.


하나는, 면벽 프로젝트의 발족.
인류는 생존을 전전긍긍 물색하기 시작하고, 절망적인 가운데 삼체 외계인들이 숨겨진 의도를 읽어내는 기술이 더럽게 없음을 바탕으로 전복을 꾀한다. 전세계적으로 뛰어난 몇몇을 물색, '면벽자'라 칭하며 그들이 머릿속으로 은밀히 계획한 생존방안을 제한없이 지원해주기로 한 것이 그것.
그러자 삼체 외계인들은 지구인 추종자들을 파벽자로서 내세워 면벽자들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함으로써 격파하도록 지시한다.

한편, 군에서는 우주전쟁을 염두에 두고 개편이 이루어진다. 군 내에서 심리적 무력감이 위험할 정도로 확산되는 중이나, 단 한 사람, 삼체인과의 교전에서 확고한 승리를 확신하는 젊은 장교, 장베이하이란 인물이 눈에 띈다.


두 번째. 면벽 프로젝트의 무력화와 동면.
면벽 프로젝트는 세 가지가 발족되었으나 단 하나를 제외하고 파벽자들에 의해 철저히 무력화된다. 심리적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한 멘털 스탬프, 항성형 수소폭탄. 이것들을 고안한 면벽자들이 파벽자에 의해, 그들이 실상 완전한 패배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동귀어진을 고안해 내었다는 의도를 발각당한 것.
파벽되지 않은 단 하나의 면벽자는 중국인 뤄지로, 그 자신 왜 뽑혔는지 모르겠다는 인물. 한때 예원제로부터 우주사회학을 전공해 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 자다. 희한하게도 지자들이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UN이 확인하게 된 탓에 면벽자가 된 케이스.
면벽자 지정 이후 독특하게도 은자적이고 사치스런 행보를 보인 탓에 무시당하고 비난받던 차였으나(걍 모든 것을 무시하고 면벽자 예산으로 이쁜 마누라 얻어 토끼같은 내새끼와 그림같은 곳에서 잘 먹고 잘 살자는 듯한, 실제로 그런 의도였음) 일이 이렇게 되자 UN 측에서는 그의 가족들을 강제동면시키고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그를 닦달한다.
뤄지는 울며 겨자먹기로 대안을 물색. 과거 예원제와 만나 우주사회학에 대해 논했던 것에서 착안해 그가 내놓은 마지막 대안은 황당하게도 '저주'인데, 구체적으로는 187J3X1항성이 거느린 행성을 향해 안테나로 저주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 그리고 저주가 실현된 것을 관측할 수 있는 시기까지 그는 동면에 들어가기로 한다.

한편, 우주군 소속 장베이하이는 수백년 후 삼체인들과 맞닥뜨릴 우주함대의 추진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후지기 짝이 없는 로켓이론에 집착하던 늙다리 학자 몇을 은밀하게 암살한다.

마땅한 묘안이 없는 상황에서, 뤄지와 장베이하이를 비롯한 많은 인구가 동면을 선택한다. 기초과학은 새로운 발견이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기존의 이론에 기대어 지구궤도 엘리베이터가 착착 건설에 들어간다.


세 번째는 삼체인의 침공.
동면한 뤄지가 깨어나, 삼체인의 침공을 몇 년 앞두지 않은 미래.
인류의 대부분은 침공에 대비하여 지하를 거점으로 생활하고 있고, 기술의 발전은 얼핏 굉장해 보인다. 우주군은 병력도 규모도 상당히 커진 상태이며, 많은 지구인들이 삼체인들을 능히 패퇴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낙관적인 상황.

그러나 최첨단 안테나를 통해 삼체인들의 우주선이 우주먼지를 흐트러뜨린 흔적을 발견해내고, 삼체인들이 보낸 은빛의 물체가 당도한 이후, 그 낙관은 깨져버린다. 지구의 기술은 지자에 가로막힌 이후 가능한 한계 내에서 최절정에 달하였으나 삼체인들의 기술은 그를 아득히 능가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을 반사하면서도 아무리 확대해도 매끄러움을 유지하는 표면을 지닌 은빛 물체. 그 물방울을 닮은 물체는 기존 물리법칙을 무시한 움직임과 속력으로, 도열해 있던 우주함대열을 관통해서는 우주함대 전체를 괴멸시켜 버린다.
개중 단 세 대의 우주선만이 탈출에 성공하는데, 그를 이끄는 것은 과거에 완전승리를 확신하는 듯 했으나 실상은 완전패퇴를 확신한 상태로 동면에 들었다가 깨어난 장베이하이다. 현 우주군의 추진력을 향상시키고자 과거 암살까지 강행했던 것은 추적이 아닌 줄행랑을 위한 것이었던 셈.

삼체인들의 공격을 최대한의 속력으로 피해 달아난 우주선 셋은 사실상 완전히 지구로부터 떨어져나온 새로운 인류가 되었으며,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타 은하계의 행성을 향해 대를 이어가며 생존을 위한 가망없는 비행을 하게 된다. 그마저도 연료 부족과 부품 노화로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직면하자, 장베이하이는 우주선 한 대만을 남기기 위해 자폭을 택한다.


네 번째. 뤄지의 계략.
지구에서는 종말을 앞둔 혼란으로 엉망이다.
뤄지는 동면에서 깨어난 이후 끊임없이 지자와 삼체 추종인들의 암살시도를 겪던 차에, 과거의 저주가 실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로써 그는 급작스레 마지막 희망으로 부상하고, 면백프로젝트는 오랜 텀을 깨고 재개된다.
그러나 뤄지는 이후 인공우주진운을 만들어내는 설원프로젝트에 오래도록 관여하는데, 당장의 구원을 바라던 많은 이들은 급속히 실망하게 되고, 그는 경멸당하기까지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원제의 무덤을 찾아 그곳에서 삼체세계와의 1대1 협상에 돌입하고, 심지어 성공하기까지 하는데, 예전에 성사된 그의 저주를 삼체세계로 옮기겠다고 협박한 덕분이다.
설원 프로젝트로 그림 형태의 진운을 만들어 삼체세계와 태양계를 우주에 폭로하겠다는 것.

과거 예원제는 우주사회학의 공리에 대해 뤄지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
첫 번째-생존은 문명의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
두 번째-문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되지만 우주의 물질 총량은 불변하다.

예원제의 공리를 바탕으로 그가 도출해낸 것은 암흑 숲 속에 적대적인 사냥꾼들이 서로를 불안해하며 우글거리듯, 우주 또한 매한가지 양상이라는 것.
발달한 문명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상대가 자신에게 우호적일지 모르는 상황이다보니 서로의 위치를 알게 되면 무조건 쏴 죽이려는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저주로 인해 187J3X1항성계가 소멸한 것도 그 때문인 것.

삼체세계가 태양계와 함께 자멸하고 싶지 않다면, 위치를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뤄지는 자신의 심장과 진운을 일으키는 항성급 수소폭탄을 연결해서 자살협박을 했고, 그는 성공했다. 이로써 삼체세계와 태양계의 지구는 서로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고, 지자의 감시는 사라지고 과학기술을 전수받게 되었다. 당분간은 평화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뤄지 역시 가족들과 재회해서 행복한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삼체세계와 그가 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주라는 암흑의 숲에 햇빛이 비치는 것이다. 서로를 불신하고 당장 파괴해야 할 위협으로 간주하는 현 상황에, 사랑과 신뢰를 싹틔울 수 있게끔 모험을 해 보는 것은 어떤가. 하고,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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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에서 책을 사준다기에 가격대에 맞춰서 고르고 골라 구입.
김보영 작품 중에 이런 소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여튼 잠시 잊고 있다가도 신작이
나오면 어떻게든 읽게는 되는 듯한 작가.

팬을 위한 글이라고. 이 글을 읽으며 결혼식을 진행하셨다는 모양.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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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단편선 번역이 새로 나왔다기에 벼르다가 지름. 아무래도 이 작가도 번역이 되는 족족 찾아 읽게 될 듯. 이번 주말에 스티븐 킹 단편선 다 읽고 나면 이어서 읽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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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표지에 페미니즘 SF, 라고 크게 적혀있다. 나야 망설이지 않고 질렀지만.
최근 인터넷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여성들만 페미니즘 서적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할 때가 있다.
작품들에 대한 인상은 "체체파리의 비법"과 비슷한데, 여기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나는 듯.

희망에 찬 아기자기하고 씩씩한 모험, 지난하고 고통에 찬 저항, 끝까지 쥐고 가고자 하는 굳은 신념, 고아한 정신들이 그저 오래 기억되지 못할 숭고한 한 때로 스러져 가는 허무. 인간에 대한 조소, 비참, 절망. 그런 정서가 담긴 단편들이랄까. ㅎㅎㅎ

아주 매력적이다. 묘하게 공감하고,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삶을 종종 비극적으로 보게 되곤 하는 입장이라면 상당히 매저틱하게 즐거울 것이라고 확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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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게 되는 결말을 지닌 단편들인데. 상당히 매력적이다.
귀차니즘이 좀 잠잠해질 때 하나 씩 여기 적어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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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page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그녀의 날씬하고 강인한 다리 한 쌍이 '인디언 걸음'으로 그녀 몸을 실어 날랐다. 신선한 비에 충만한 밤, 그녀의 기분은 이제 구석구석 상쾌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하고 지칠 줄 모르는 자신의 몸을 사랑했다. 물론 배달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 달빛으로 빛나는 이 근사하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젊고 건강한 몸으로 밤길을 거닐다니.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발걸음도 가볍게 타박타박 걸었다. 여보시오, 자매님들! 편지나 소포 없나요?
...
(p.128)
그녀는 길목에 있는 건물 잔해를 쏜살같이 비집고 통과하면서, 이 아름다운 자매에게 기쁘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빛이 가득했다.
"어디로 가세요? 산책을 나왔나요? 저는 배달부예요." 그녀는 자매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설명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친구가 사방 천지에 있었다. "편지나 소포 없나요?"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평화롭게 서 있는 낡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들을 피해, 함께 성큼성큼 걸어서 옛 도로의 중앙분리대를 따라 내려갔다. 길 한쪽에는 구부러진 이정표에 '댄 라이언 고속도로, 오하이오 공항'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쪽으로, 디모인까지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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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여자들-
"밤중에 나다니는 여자들은 미친 거지. 왜 밤에 나가서 봉변을 당하는거야."
..에 대한 직접적인 조롱이자 자기파괴적인 단편?ㅋㅋㅋㅋ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작가는 "그래. 밤에 다니는 미친 여자를 그려볼까." 그랬을까?
근데 미친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가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지 보면..
왜 밤에 두려움에 떨고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지. 미치고 팔딱 뛸 것 같아 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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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page

"내가 말해주려는 건 말이야, 이건 함정이라는 거야. 우린 초정상 자극에 맞닥뜨렸어. 인간은 이계교배 생물이야. 우리 역사 전체가 이방인을 찾아내서 임신시키려는 길고 긴 충동이야. 아니면 이방인에게 임신당하거나.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마찬가지니까. 다른 피부색, 다른 코, 다른 엉덩이, 뭐든 간에 남자들은 그 다른 것과 성교를 하든지 시도하다가 죽어야 해. 그건 내재된 충동이야. 그리고 그 이방인이 인간이기만 하면 잘 돌아가지. 수백 년 동안 그런 방식으로 유전자가 순환했어. 하지만 이제 우린 뒤엉킬 수 없는 외계인들을 만났고, 시도만 하다가 죽기 직전이야.... 내가 내 아내를 만질 수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이봐. 새에게 자기 알처럼 생겼지만, 더 크고 더 화려한 가짜 알을 주면, 그 새는 자기 알을 굴려서 둥지 밖으로 버리고 가짜 알을 품는다는 거 알아? 그게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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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어나 보니 나는 이 차가운 언덕에 있었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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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page...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무자비하게 구체화하는 힘이 더욱 높이 솟구치며 어렴풋이 불쾌한 존재감을 일깨웠다. 먼지 속의 실체 없는 동요가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다만 그것은 차가운 바윗덩어리를 유령처럼 감싼 죽은 생명의 막에 두드러진 결절 같은 형태였다. 도달할 수 없이, 고립되어...그는 다른 존재에게 접촉해보려다가 엄습하는 새로운 두려움에 소스라쳤다. '저들도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까?' 고통이 진정으로 우리의 신경에서 가장 격렬한 불이었던가? 고통만이 죽음을 넘어서까지 그 불길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은, 환희는 어떻게 되고? 여기에 사랑이나 환희는 없었다.
그런 확신이 밀려들자 그는, 이전에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았던 그는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지상의 모든 고통이, 무효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 스탈린그라드와 살라미스에서, 게티즈버그와 테베와 됭케르크와 하르툼 전투에서 망가진 영혼들은 영원히 절뚝거린단 말인가? 라벤스브뤼크와 운디드니에는 아직도 학살자의 공격이 떨어진단 말인가? 카르타고와 히로시마와 쿠스코의 망자들은 여전히 불타고 있단 말인가? 유령이 된 여인들이 오직 다시 한 번 강간으로 고통받고, 다시 한 번 아기들이 살해당하는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깨어난단 말인가? 모든 이름없는 노예가 아직도 강철의 아픔을 느끼고, 한 번 날아갔던 모든 폭탄과 탄환과 화살과 돌은 아직도 비명을 지르는 목표물을 찾아 날고 있단 말인가.... 끝도 위안도 없는 잔학 행위가, 영원히 계속된단 말인가?
...
(p.430)
'우릴 죽게 해줘!' 하지만 붕괴해가는 그의 정체성은 저항을 더 버텨내지 못하고, 그저 그게 사실이라는 것만, 견딜 수 없게도 모두 사실이라는 것, 이 모든 일이 전에도 행해졌고 다시 행해질 것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다시, 또다시, 영원히 되풀이되리라. 자비 없이.
그리고 무너져내리는 층들을 뚫고 가라앉으면서 그는 오직 절망밖에 붙들지 못했다.
...외계 생명이 그들을 버리자 다들 최후의 암흑을 향해 가라앉고, 또 가라앉고... 그러다가 이해할 수 없는 비탄과 더불어 실재하는 마지막 한순간 그는 그 자신이, 혹은 그 자신이었던 배열이 새벽, 자갈 위에 부츠를 딛고, 손은 녹슨 픽업트럭에 얹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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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연기는 언제까지나 올라갔다 中-

윤회와 영겁의 고통..뭐 그런 게 생각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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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page...
그는 미소를 짓다가 뺨이 자갈에 찔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길 아래 깔린 황갈색 자갈에 뺨을 대고 누워있는 모양이었다. 외계의 공기가 타는 듯한 목구멍에 도움을 줬다. 그는 계속 그 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저 푸른 라일락 빛깔은, 저건 하늘일까? 티 하나 없이 매끈했다. 구름도, 새도 없었다.
저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들판? 이 마법 같은 통로는 무슨 용도일까? 길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초공간장?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존재는 없었다.
다이얼 표면 위쪽으로 시선을 올리니 투명한 한 쌍의 나선 같은 장치가 보였다. 한쪽 코일에는 번쩍이는 액체가 가득했다. 다른 한쪽 코일에는 그저 번득이는 불꽃 맻 개만 있었다. 그가 지켜보는 동안 빈 코일의 불꽃 하나가 꺼지더니 액체가 가득한 쪽 코일이 깜박거렸다. 이어서 또 하나가 꺼졌다. 그는 지켜보며 생각했다. 간격이 규칙적이다.
그러니까 저건 시간을 재는 장치였다. 에너지 저장량을 표시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거의 끝이 가까웠다. 마지막 불꽃이 꺼지면 문이 사라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문은 여기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린 걸까?
양 몇 마리, 반쯤 죽은 토착민 하나 정도나 받아들리면서, 클리본 산의 짐승들이나 맞이하면서.
이제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 오른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왼팔과 다리는 무거운 짐 뭉치나 다름없었다. 그는 몸을 질질 끌고 거의 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기어갔다. 1미터만 더 가면...그러나 이제는 팔에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끝났다.
어제만 산을 올랐더라도 좋았을 것을. 스캔을 하는 대신에 말이다. 스캔은 물론 비행기가 클리본 산 주위를 돌면서 시행했다. 하지만 여기 이 길과 문은 비행기로 볼 수가 없었다. 그때는 여기에 없었으므로. 이 길은 뭔가가 저 아래 첫 번째 장벽을 가동시키고, 두 장벽을 다 밀고 올라올 때만 존재한다. 아마도 산을 오를 의지가 있는 커다란 온혈동물이 올 때만.
'컴퓨터는 인간의 뇌를 해방시켰지.'
그러나 컴퓨터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직접 클리본 산의 바위를 기어오르지 않았다. 오직 의문을 품을 만큼 멍청하고, 돌 위에 엎드려 악착같이 지식을 구할 만큼 멍청한 사람만이 여기에 왔다. 위험을 감수하고, 경험을 하고, 혼자 남은 사람만이.
값싼 방법이 아니었다.
빛나는 배는, 그 우주선 안에 갇힌 성간 과학자들은 가버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에반은 이제 발버둥 치기를 그만뒀다. 그는 가만히 누워서 외계 시간 장치의 끄트머리에서 빛나던 불꽃이 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곧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소리라고 할 수도 없는 희미한 소리와 함께, 빙하가 오기 전부터 클리본 산에서 기다렸던 길과 그 길에 딸린 장치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그 길이 사라지자 바람이 다시 격렬해졌지만, 그는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아주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그 얼굴과 몸의 뼈가 언젠가는 클리본 산의 빈 바위에 흩어진 금빛 자갈과 뒤섞이게 될, 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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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잃어버린 길을 따라 여기에 왔네 中-

강렬한 허무감. 아주 인상적이었음.
삽질들이 모이고 모이고 모여서 맞이하는 발견과 발전의 역사?를 시사할 수도 있겠고. 과학적인 것, 기계에 대한 맹적인 신뢰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겠고.
아무튼 굉장한 단편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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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page

"너...익었어?"
그의 마음속에서 부드러운 틈이 생겼고, 그 갈라진 틈 사이로 자시느이 겁에 질린 덩굴손같은 마음 줄기가 뻗어 나가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는 미끄러지며 깜깜한 밝음 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광대한 비공간이었다. 거기에는 은하들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유령 같은 목소리들이, 쫓을 길 없이 표류하는 사상의 실마리들이 떠돌았다. 시간을 잃어버린 그 광대함 속에서 떠도는 뭔가가, 비존재의 바람에 실린 실체 없는 에너지의 섬세한 그물망 같은 것이 그를 살살 끌어당겼다. 생명? 이건 죽음의 생명 같은 건가? 그것이 그를 끌어당기고 또 끌어당겼다.
아니야! 아니야!
겁에 질린 그는 자신을 다잡았고, 깨부쉈고, 싸웠다. 그는 헐떡거리며 노이온의 가지 아래 네 발로 엎드린 채 현실로 돌아왔다. 빛과 공기. 그는 숨을 몰아쉬며 흙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그는 자기 자신이 끊어버린 연결선을 찾아 마음속을 살폈다. 연결선은 거기 없었다.
"맙소사, 그건 네 불명성인가?"
노이온은 아무 말 없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그것의 기운이 빠졌다는 걸 알아챘다.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한 차원을 열었던 것이다.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를 초대하기 위해.
그때 그는 이해했다. 그의 세 번째 소원,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것일 수 있었다.
그는 해가 아래쪽을 향해 달리는 동안 자신을 둘러싼 생명의 소리들도 듣지 못한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혼자, 다 벗어버리고 간다... 간다, 혼자... 그 목소리들은 뭔가 의미가 있었을까? ...간다. 영원히, 그 기묘한 상태를 만나기 위해... 혼자 간다. 나의 실재가, 나의 진정한 자아가 혈통과 자식 생산과 돌봄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져서....
그런 생각이 희미하지만 달콤한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았다. 간다. 혼자, 자유롭게.... 사람의 본심에 담긴 다른 목소리. 그의 가장 인간다운 부분이 한구석에 품은 가장 깊은 갈망. 종의 폭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영원히 사는 것....
그는 하늘이 닫히는 것을, 자신의 동물적 심장에 살아 있는 피가 맥동 치며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신음했다. 하지만 그는 동물, 그것도 인간 동물이었고, 새끼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 그는 혼자 갈 수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너의 길은 내 길이 아니야. 난 내 피붙이들과 함께 여기 있어야 해. 우리, 다시는 이 얘기 하지 말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나를 도울 수 있다면, 내 새끼들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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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지막 오후 中-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단편선을 두 개로 나누어 출간한 거라고 봤는데. 이 단편선-체체파리의 비법+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을 흐르는 정서를 보면. 작가가 인류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고, 진화하는 일련의 과정-특히, 남성이라는 주류가 이루어가는 목적지향적, 번식지향적, 파괴지향적, 약육강식적인 역사를 일종의 동물종의 번성과 사멸의 번복으로 바라보는 듯한. 역겨움과 조소, 허무..랄까 진저리 같은 것들이 강하게 느껴지는 단편들이 여럿 있다. 아니..대체로 모든 단편에 담겨 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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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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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지지리 안 읽히는 탓에.. 괜찮은 작가들의 단편집이 반가운 요즘.

킹의 다섯번째 단편선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예전에 서점에서 훑어본 <스켈레톤 크루>가 처음이었는데, 처음 두어 편을 읽고 덮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류의 공포물은 별로 안 땡긴다고 느꼈고, 전반적으로 미국적인 정서가 강한 편이어서 적응이 필요했던 듯.
이후에 비교적 최근작인 장편 두어 편을 읽고 나서 (암살을 막기 위한 타임슬립물인 "11/22/63"시리즈, 샤이닝 후속작인 "닥터 슬립") 좀 면역이 생겨서 파생 영화(샤이닝, 미스트, 미저리..좀 있으면 다크 타워랑 그것이 개봉하겠는데. 다크 타워 평이 개떡같긴 하지만 이드리스 엘바가 나오시니 아무리 구려도 볼 예정.)나 드라마(언더 더 돔.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최근 나오는 중.)도 좀 찾아보고 있고..이 단편선도 샀더랬고. 조금씩 스티븐 킹 소설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단편선 읽고 나면. IT이랑 다크타워 시리즈를 시작할 예정. 읽을 거 많군.

올초 넷플릭스 결제 이후에 지지리도 책을 안 읽게 되어버려서, 항상 외출 때 서점을 들르는 버릇 탓에-그리고 가면 꼭 한두 권은 사게 되는지라 구매는 했지만 한 달 가까이 묵혀두었다.
읽던 초반에는 언제까지 묵혀둘거나..기왕 산 거 눈으로 글자를 하나하나 훑기라도 하자, 하고 기계적으로 시작했는데 마지막 즈음에는 상당히 몰입했고 꽤 즐거웠다.

나중에도 심심할 때 한 번 더 훑어볼 것 같은 단편은 "진저브레드 걸", "N.", "아주 비좁은 곳" 정도. "휴게소"나 "벙어리"도 끼워넣을까 했는데 소재 자체가 그다지 유쾌한 건 아니어서..모르겠군.
옮긴이의 말마따나, 대체로 초기 단편선과 달리 실제로 있을 법한 현실적인 공포물이 많은 편인데, 개중 생존과 관련된 스릴러물들이 이 선집 내에서 분량도 많은 편이고 몰입도도 강하다.
코스믹 호러 느낌의 "N."은 그런 현실적 공포와는 성향이 다르기는 하지만,
러브크래프트 단편선집에서 재미난 몇 편을 발견했던 기억 + 최근 몇년 새 이승열씨가 영미문학관에서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주는 러브크래프트 단편들에 대한 호감 + 영화 미스트에 대한 호감 등등이 얽혀서. 그리고 작중 묘사된 강박증과 코스믹 호러 설정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서 꽤 재밌게 읽었더랬음.

선셋노트에서 작가가 꿈을 옮겨 썼다고 밝힌 단편인, "하비의 꿈"이나 911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뉴욕타임스 특별 구독 이벤트", "그들이 남긴 것들". 그리고 사후세계와 관련된 "윌라"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이야기였고-재미보다 다른 의도가 큰 이야기들이지만서도-환각을 다룬 "헬스 자전거"는 흥미로운 전개이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지옥에서 온 고양이"는 다른 단편과는 좀 다른 느낌의, 확실히 오래 전에 집필한 듯한 느낌이 드는 단편임. 사악하고 영악한 고양이라니. <스켈레톤 크루> 단편선집에 들어가야 했을 법한 느낌.

읽고 언능 알라딘에 팔아버려야지 했는데. 가끔씩 강렬한 단편들은 몇 년이 지나 반짝하고 당길 때가 있어서, 일단 내비두는 걸로.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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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작가가 연재하는 'SF, 미래로 가는 이야기' 칼럼에 나오길래. 관심이 생김.
http://hankookilbo.com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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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말인가 90년대 쯤에 나온 책이다. 당시 일본에는 이미 결혼하지 않은 30대 여성들이 사회현상화 하던 때였던 듯. 그를 바라보는 두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와 노부타 사요코의 대담집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최근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저서가 재조명되면서 한국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회학자인데, 이번에 도서관에서
검색하니 우에노 치즈코 관련 서적이 이 책 밖에 없어서 일단 빌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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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을 돕는 심리상담센터를 오랜 시간 운영해 온 노부타 사요코와, 페미니즘 저서로 유명한 우에노 치즈코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둘러싼 사회현상에 대한 궁금증을 나누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방식.
30대 비혼 여성들은 왜 비혼으로 남았는가, 성과 사랑에 대한 그들의 사고체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무엇이 그들을 비혼으로 이끄는가, 비정규직 비혼 30대 여성,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당시 일본에서) 그들을 끼고 사는 일본의 베이비부머들, 부모세대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그뿐만 아니라 결혼을 둘러싸고 사회에서는 어떤 성역할을 양성에게 밀어붙이고 있는가-여자들은 결혼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여성들을 혐오하는 남성들은 왜 나타나는가, 폭력적인 결혼생활을 접지 못하는 여자들은 왜 그런가, 등등에 대해 의논한다.
그런대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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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후에 읽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겹쳐지는 감이 있기는 한데, 몇 가지 추려보면 이런 얘기들이 나옴. (나머지 주제들은 잘 기억이 안 나서 못 적겠다.)

-남성이 진정한 남성이 되려면? 연애 못하는 남성에 대한 이야기
남성들을 진정한 남성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실은 여성이 아니고 남성공동체이며, 남성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여성을 소유하는 것이 일종의 자격조건 같은 것으로 굳어져 왔음. 실상 오래 전부터 남성공동체의 서열에 맞춰 여성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었고, 중매결혼이 있던 시기까지는 남성들이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대부분 결혼하여 아내를 소유하고, 번듯한 남성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었음. /여성을 소유하지 못한 남성, 동성애자 남성들은 진정한 남성이 아닌, 여자 같은 존재로 배척당하며, 연애하지 못한 분노를 일부 남성들이 폭력이나 분노로 표출하는 것은 이런 연유. 그들은 여전히 여성을 일종의 배부받는 자원 정도로 여기고 있음./ 연애하지 못하는 남성들(경제적으로, 외모적으로 등등 경쟁에서 밀리는)을 사회적으로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일부 남성들의 주장이 일본에서도 수십년 전부터 이슈를 불러 일으킨 바 있었으나, 저자는 여성의 경우 이슈조차 되지 못하던 사안이지 않으냐, 아직 선택받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탓이라며..커뮤니케이션 기술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느냐고 제안.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의 여성혐오
남성에게는 여성 그 자체보다도 남성공동체의 인정이 더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또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여성이 불가피하게, 수단적으로 필요하다. 결국 여성을 남성과 대등한 관계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여성혐오.

-30대 비혼, 비정규직 여성을 바라보는 대담자들의 시각 -부정적인 듯.
보수적인 성 관념과 자유로운 성 관념 사이에 낀 세대. 결혼이 꼭 필요하다고 보지는 않는 세대. 30대 비혼 비정규직 여성의 경우 경제적으로 부를 쌓은 베이비 부머 부모와 함께 안락한 한 때를 보낼 수 있을는지 몰라도, 부모의 부가 끊기고 더 이상 비정규직 일자리에서 버틸 수 없게 되면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일본에서는 비혼 자녀가 고령의 부모를 맡아 개호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복지의 하위계급으로서 배척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 일본의 비정규직 비혼 여성 30대(당시)들은 결혼 전의 유예로서 비혼을 택하는 경향이 있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이 없는 상태이기에 위험. 베이비부머들은 이런 상태를 두고보고 있는데, 딸이 자신들의 뒷날을 개호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심 때문이기도 함(현 2,30대 한국의 비혼여성들과는 다른 듯)

-결혼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
남성은 결혼을 통해 남성공동체로부터 번듯한 자격을 갖춘 진정한 남성으로서 인정받게 됨. 여성의 경우 남성으로부터 선택받음으로써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하게 됨. 어떤 조건의 남성과 결혼하였는가는 여성들 사이에서 일종의 척도로 분류되기도. 여성이 이런 '여성으로서의 가치증명'을 남성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부여받고자 하는 것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롭게 비혼을 택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 이야기 하고 있음.

-결혼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여성들의 이유
결혼을 '자신의 선택' 이라고 여기고, 남편을 '자신이 선택한 남자'로 '내가 없으면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음. 일종의 자존심. 이런 여성들의 경우 자신들의 불행한 결혼에서 벗어나면 결국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자립하지 못한 상태의, 초라한 중년 여성'으로 남는 것이 두려운 탓에, 가정을 책임지고 꾸려나가는 가정 주부로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함.
(학습된 무기력 이론과는 또 다른 이야기라 신선한 감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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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30대 비혼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던 것도 컸는데, 대담에서 다룬 수십 년 전의 일본 상황은 현재와는 좀 맥락이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아쉬움이 컸다.
최근의 여성들은 이 대담집 속에서처럼 부모가 지닌 부의 그늘 아래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며 미래에 대한 대책 없이 결혼 전의 유예로서 비혼을 한다기보다,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비혼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적극적으로 현재와 노후를 대비하고자 하는 흐름이 더 크다고 보는데 말이다.
반면 결혼과 관련된 화두는 꽤 흥미롭게 읽었다. 연애나 결혼을 통해 두 성은 어떤 것을 노리는가-말이다. 진정한 남성이 되는 자격조건을 얻기 위해, 진정한 여성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라는 것. 사회 속에 녹아들고, 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 두 대담자는 당시 그런 수동적인 인정받기는 필요없다고 외치는 비혼자가 참 드물거라고 아쉬워했지만, 요즘을 보면 인정따위 없어도 된다고 외치는 자유로운 비혼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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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이슈가 계속 불거지는 요즘, 덕분에 읽을 거리가 참 많아졌다고 느낌. 우에노 치즈코 이야기는 자주 접했고,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책이라 읽어보겠다고 샀다.
'결혼제국'의 이야기와 많이 겹치는 내용도 있고 한데, 좀 논문스럽게 딱딱한 면도 있고 내 입장에서는 너무 깊이 들어간다 싶은 면도 있어서(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고 싶지는 않은데..일본신화 속의 여성혐오적 텍스트라..)적당히 흘려 읽을 부분은 흘려 읽음. 기억나는 몇 가지만 거칠게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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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딸의 갈등에 대해 조망한 부분.
이건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던 얘기기도 한데. 아무튼 인상적. 시대가 변하고 여성 역시 사회진출이 가능해지게 되면서, 어머니들은 딸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한다는 것. 아들처럼 출세해서 좋은 직업-아직 유리천장도 있으니 조직적인 회사보다는 고소득 자영업직을 구하기를 바라는 한편, 딸로서 좋은 혼처로 시집가서 여성으로서의 가치증명(어쩌면 어머니의 위신을 세워주는 제2의 인생?)을 해 주기도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후 역시 며느리보다 딸이 돌봐주기를 더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아들보다는 딸을 더 원한다는 말들이 별로 달갑지 않은 게 어렴풋이 이런 것들을 감지하고 있던 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음.. 아무튼 태어날 때부터 선별당하던 것 보다 나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딸들이 요구받는 것들이 과거에 비해 늘어난 것은 맞는 듯. 주부가 요구받는 것들이 많아진 것과 마찬가지. 남성과 다름없이 사회생활을 하는 존재로서나..돌봄을 행하는 여성으로서 동시에 기대를 짊어지게 된 것.

남성의 존재증명과 연애
예로부터, 진정한 남성으로서 남성공동체에게 인정받는 것이 남성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인정을 받기 위한 자격요건 중 하나가 여성을 소유하는 것이었고. 여성을 소유하는 것, 여성과 연애를 하고 결혼하는 것이 그래서 남성들에게는 중요해진다. 예전에는 남성공동체의 위계질서를 지키다보면 자연스럽게 주어지던 여성이, 혹은 중매를 통해 어떻게든 얻어지던 여성이 구하기 어려워지고,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측면이 생기면서 아직 세태에 적응하지 못한 남성들이 '경제적으로나 외모적으로 딸려서 연애시장에서 인기 없는 남성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 혹은 '여성들이 따지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기적이다' 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 일본에서도 자주 있었다.(최근에 이슈가 된 책이기는 하지만, 십수년 전에 씌어진 책이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외모적으로 딸리는 여성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이슈조차 되지 않았는데도. 장애가 있는 남성의 성욕 해소에 대해서는 이슈가 되지만 반대에 대해서는 언급되지도 않았고 말이다.(그 경우 성적인 권력관계나 힘의 차이가 너무 또렷해서 성사되기도 힘들겠고-되려 여성장애인의 가족들이 불행한 사태에 대비해 불임수술을 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니 말 다했지..)
여성 역시 오랜 세월동안, 결혼을 통해 남성으로부터 선택받고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증명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교육받아왔기 때문에, 남성의 선택을 놓고 경쟁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여학교 내 문화와 같은 여성들간의 문화는 양성이 섞여 있는 곳의 문화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여성들에게 인기있는 여성들과 남성들이 선호하는 여성은 또 달라지는 추세가 있었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남성들은 소유하기 적합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만만한 여성을 더 선호하고, 여성들은 빼어난 외모보다는 수더분한 외모의, 털털하고 자조적인 농담을 하는 여성들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던 것이 사실.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90년대 화제가 되었던 사건. 당대 처음으로 여성 역시 앨리트 코스를 밟는 것이 가능해진 세대. 그녀는 왜 억대 연봉을 받는 조직의 핵심, 엘리트였음에도 밤거리를 쏘다니며 헐값에 몸을 팔았는가. 그에 대해 여러 르포와 소설과 추측이 난무했지만, 우에노치즈코는 사건을 뒤집어 생각해보려 한다. 엘리트코스를 처음 뚫은 여성에 대한 세간의 어마어마한 기대와 거기서 오는 책임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트들의 자리 중 '여성에게 허락된 자리'만을 얻을 수 있었던, 일반적은 OL과 다르다고 분류되었으나 실제로 모호한 대접을 받던, 결혼시장에서는 꺼려지는 존재가 되었던 여자. 저자는 그녀가 남성들이 꾸려놓은 여성혐오적인 사회의 스트레스로 인해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느린 자살과도 같은 상태였으며, 매춘을 통해 남성들에게 복수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헐값, 또는 무료로 남성들을 받아들이고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메모한 것은 것은 그녀 역시 그 남성들의 가치를 그렇게 매겼다는 것. 여성을 인위적으로 자신보다 낮추지 않으면/혹은 자신의 것으로 하나 이상 소유하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얻지도, 욕구해소를 보장받을 수도 없는 미약한 존재인 남성들의 모순을 자해의 방식으로 비웃은 것이라는 것이다.
(앞장에서 원조교제에 대한 이야기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다루고 있었다. 남성들이 너무도 원하기에 값이 뛴 어린 육체를, 스스로 매춘이라는 방식으로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자해의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세상에 복수하는 방식을 취하는 여자아이들이 많다고)

오랜 여성혐오의 역사
일본 신화에서, 이런저런 일본문학작품들에서, 춘화 우키요에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천황가의 대 잇기 풍습에서, 드라마 속 대사에서 등등. 남성중심적인 공동체 구성의 역사, 성녀-어머니-부인(가부장제속의 여성)거나 창녀-미혼여성-애인(가부장제밖의 여성)로서 갈라지며 끊임없이 정형화된 객체로서만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을 끊임없이 엿볼 수 있고..최근에도 '나는 아니니까' 라며 일부의 여성들을 타킷화 하여 악녀로 그려내고 전락시키는 류의 여성작가 문학작품이 화제가 되는 등 남성에 의한, 여성 자신에 의한 여성혐오는 뿌리 깊은 역사를 다져온 바 있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고, 그를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 저자의 말.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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