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지지리 안 읽히는 탓에.. 괜찮은 작가들의 단편집이 반가운 요즘.

킹의 다섯번째 단편선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예전에 서점에서 훑어본 <스켈레톤 크루>가 처음이었는데, 처음 두어 편을 읽고 덮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류의 공포물은 별로 안 땡긴다고 느꼈고, 전반적으로 미국적인 정서가 강한 편이어서 적응이 필요했던 듯.
이후에 비교적 최근작인 장편 두어 편을 읽고 나서 (암살을 막기 위한 타임슬립물인 "11/22/63"시리즈, 샤이닝 후속작인 "닥터 슬립") 좀 면역이 생겨서 파생 영화(샤이닝, 미스트, 미저리..좀 있으면 다크 타워랑 그것이 개봉하겠는데. 다크 타워 평이 개떡같긴 하지만 이드리스 엘바가 나오시니 아무리 구려도 볼 예정.)나 드라마(언더 더 돔.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최근 나오는 중.)도 좀 찾아보고 있고..이 단편선도 샀더랬고. 조금씩 스티븐 킹 소설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단편선 읽고 나면. IT이랑 다크타워 시리즈를 시작할 예정. 읽을 거 많군.

올초 넷플릭스 결제 이후에 지지리도 책을 안 읽게 되어버려서, 항상 외출 때 서점을 들르는 버릇 탓에-그리고 가면 꼭 한두 권은 사게 되는지라 구매는 했지만 한 달 가까이 묵혀두었다.
읽던 초반에는 언제까지 묵혀둘거나..기왕 산 거 눈으로 글자를 하나하나 훑기라도 하자, 하고 기계적으로 시작했는데 마지막 즈음에는 상당히 몰입했고 꽤 즐거웠다.

나중에도 심심할 때 한 번 더 훑어볼 것 같은 단편은 "진저브레드 걸", "N.", "아주 비좁은 곳" 정도. "휴게소"나 "벙어리"도 끼워넣을까 했는데 소재 자체가 그다지 유쾌한 건 아니어서..모르겠군.
옮긴이의 말마따나, 대체로 초기 단편선과 달리 실제로 있을 법한 현실적인 공포물이 많은 편인데, 개중 생존과 관련된 스릴러물들이 이 선집 내에서 분량도 많은 편이고 몰입도도 강하다.
코스믹 호러 느낌의 "N."은 그런 현실적 공포와는 성향이 다르기는 하지만,
러브크래프트 단편선집에서 재미난 몇 편을 발견했던 기억 + 최근 몇년 새 이승열씨가 영미문학관에서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주는 러브크래프트 단편들에 대한 호감 + 영화 미스트에 대한 호감 등등이 얽혀서. 그리고 작중 묘사된 강박증과 코스믹 호러 설정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서 꽤 재밌게 읽었더랬음.

선셋노트에서 작가가 꿈을 옮겨 썼다고 밝힌 단편인, "하비의 꿈"이나 911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뉴욕타임스 특별 구독 이벤트", "그들이 남긴 것들". 그리고 사후세계와 관련된 "윌라"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이야기였고-재미보다 다른 의도가 큰 이야기들이지만서도-환각을 다룬 "헬스 자전거"는 흥미로운 전개이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지옥에서 온 고양이"는 다른 단편과는 좀 다른 느낌의, 확실히 오래 전에 집필한 듯한 느낌이 드는 단편임. 사악하고 영악한 고양이라니. <스켈레톤 크루> 단편선집에 들어가야 했을 법한 느낌.

읽고 언능 알라딘에 팔아버려야지 했는데. 가끔씩 강렬한 단편들은 몇 년이 지나 반짝하고 당길 때가 있어서, 일단 내비두는 걸로.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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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서 박경리 문학관에 들른 후에. 대하소설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져서 최근 김약국의 딸들부터 해서 토지도 빌려다 읽고 있다. 술술 읽힌다. 다만 평소에 딴데 한눈팔 때가 잦아서 맘 먹고 책을 펼쳐드는 것 자체가 어려워 문제임. 일단 펴면 재밌는딩.

여러 사람의 삶의 양상을 보여주는 방식이다보니 한두 주인공에 집중되어 서술되는 소설들과는 또 느낌이 좀 다르다.
시대상이 좀 더 눈에 잘 들어오고. 이런저런 인간군상의 다양성도 눈에 띄고. 온갖 일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어져오는 생의 고리들이 대단하다 싶고. 삶 자체가 참 고생스럽고 지루하고 버거운 것인데 참아내며 새끼를 길러내 온 옛 사람들을 생각하면 조상과 자식이 다 뭐고 그렇게들 되뇌던 인간의 도리란게 뭔가..바보같구나 싶어 혀를 차고 싶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특히 옛 시대의 여자들의 삶이란 것이. 왜들 그렇게 매여 살아야 했을꼬 싶고 신분고하 막론하고 노예와 다를 것 없다 싶기도 하고. 갑갑해져오는 구석이 있다.
 그 와중에 벌어지는 찰나의 사랑이나 야망이나 그런 것들이 그 진저리나는 구덩이 속에서 화르륵 불타올랐다 스러지는 걸 보면 또 눈길이 끌리고. 그렇다. 
토지같은 경우는 일제강점기가 막 시작되려는 찰나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라. 인물들이 그 시대적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버티다가. 느슨한 신분적 경계를 타고 들떠서 뒤엎기를 시도하다가. 이래저래 스러지고. 뭐 그런 양상들이 또 그럴싸하다.
중독성이 있는 이야기들이어서. 21권까지 쭉 잘 볼 수 있길. 지금 3권 읽고 있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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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에 따라 끄적인 낙서. 스포.)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 '깊이에의 강요(외 승부, 문학에 대한 고찰?)', '비둘기', '좀머씨이야기(외 콘트라베이스)'.
중 제일 읽기 껄끄러웠던 콘트라베이스는 막상 계속 읽어가다보다 생각보다 짠-했다.
처 음엔 이 놈의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줄창 독백식으로 음역이 어쩌네, 음악의 중심이네, 결국 내가 좋아라 하는 메조소프라노를 성공시키게끔 하는 중역도 콘트라베이스가 해 낼 것이네 하면서 된통 모를 용어들을 들어가며 콘트라베이스 자랑만 해 대나 싶어서 몇 번이고 읽다가 덮어버렸었는데. 후에 '그래도 빌렸으니 해치우자'하는 썩 고상하지 못한 심리가 발동해서 첫 부분 모를 부분을 슥석 훑고 넘어가다보니, 이 주자가 생각처럼 맹물맛 자랑쟁이인 것 만은 아니었다. 
여느 악기보다 연주하고 운반하는 데 큰 체력을 소모하게 되고, 존재감이 큰 탓에 집이든 연애중이든 항상 껄끄럽게 의식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악마의 속삭임이나 불운의 징조따위를 위해 쓰이는 음침한 음색. 싸랑하는 메조소프라노 사라와도 결코 합연할 가능성이라곤 없는 그 음색. 보잘 것 없는 하찮은 보수. 그리고 부모에 대한 묘한 반항, 자기파괴같은 데서 시작하게 된 기억 따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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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자랑을 시작해 댈 때부터 끝까지. 요놈의 주자는 썩 고상하지 못한 태도로, 말을 성글게 씹어 뱉듯 내뱉으면서 숨을 고르고, 맥주 한 모금을 꿀꺽 마시고, 다시 말을 토해내듯 내 뱉고, 했다. 옆에 콘트라베이스를 두고. 가끔 자랑질과 함께 그 현을 켜기도 하고, 푸념과 함께 그닥 위대하다고 할 수 없는 작곡가들이 콘트라베이스를 위해 작곡한 레코드 판을 슥슥 올려놨다, 내려놓고 다시 딴 걸 집어 올렸다, 하면서. 여튼 줄창 씨근덕 대면서 맥주마시고, 판 바꾸고, 음악사며 작곡가들을 이래저래 잣대로 재고 늘이고 멋대로 자르고 붙이고 하면서 얘기를 해 나갔다. 첨엔 무척 산만해보였는데.
취기로 달아올랐을 얼굴, 조금 틀어지고 쉭 소리날 말투, 허풍스레 화제가 조금씩 바뀔 때마다 판을 올리고 내리는 손짓 따위가 저런 말들과 섞이니까. 참. ...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고. 
매번 주목받지도, 가치를 인정받기도 힘든 천덕꾸러기 신세를 한탄하고. 
일단 하는 일이니 최대한 애정을 가지려 애쓰거나 혹은 자연스레 애정을 갖게 되고. 
그러다 음침한 소리를 연주하는 자신과 반대로 아름다운 높은 음색, 주목의 대상인 사라에게 끌리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며 절망하고 
그래서 콘트라베이스를 또 원망하고, 
종종 부수고 싶다고 여기면서도 풀칠-그리고 남아있지도 않을 장래를 생각하며 소심하게 얽매이고, 
그러다 종종 또 오케스트라 연주 중 '사~!라~!'하고, 쫓겨날지라도 외치는,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한 번이라도 각인되어볼 거라며 일탈을 꿈꾸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끌어안은 고통. 애쓰는 동안 맹글어진 애착. 애증. 애증. 다 때려치고 싶은 맘. 더 인정받고픈 욕구. 따위..
어찌나 애처롭던지. 세상엔 분명 이런 사람들 투성이겠지. 주목받는 직업은 아주 소수에 불과할 뿐, 실제로 다른 이의 주목을 받으며 멋나게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아니, 것보다도, 스스로 매번 고무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가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긍정적인 자세-따위는 어디까지나 이상 속이고. 실제로는 다들 애써 애착을 가질만한 효과적인 고리는 한 두어 개나 한계로 만들어두고서 끊임없이 애증에 시달리며 사는 것 아닐까. 사랑해보려하고, 실로 사랑한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한 순간, 현재의 나는 극복해내기 어려운 상황 속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매여있는 걸 알아버리는, 거 참 허한 '포지티브 씽킹'. 긍정적인 인간상. 두터운 꺼풀을 써야 하는 건 누구나의 임무이자 스스로의 진통을 위한 짓이라지만.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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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가 갖는 무수한 설정과 이미지에 기여한 뱀파이어 고전 단편들.
고전 호러 클리셰들을 하나하나 훑는 기분이다. 
그게 별로란 건 아니고. 나름 재미있게 읽고 있다.
옛날사람들은 이런 걸 읽으면서 떨었단 말이지..호옹호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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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page꿈에서 모호하고 기묘한 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강물을 거슬러 움직일 때나 목욕을 할 때처럼 온몸에 전해지는 유쾌하고 차가운 전율이었다. 곧이어 전율과 함께 간헐적으로 꿈에 나타나는 장면이나 사람 혹은 그들의 행동 따위는 너무도 어렴풋해서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오랫동안 엄청난 정신력을 쏟으며 위기를 헤쳐 나온 것처럼 탈진감과 오싹한 여운이 남았다. 잠에서 깨어 있을 때도 거의 칠흑처럼 어두운 어느 공간에서 낯선 이들에게 말을 거는 느낌이 지속되었다. 특히 맑고 웅숭깊은 여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천천히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 강했는데, 그 목소리는 언제나 형언할 수 없는 엄숙함과 공포감을 자아냈다. 손 하나가 부드럽게 내 뺨과 목을 쓰다듬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따스한 입술이 내 목에 이르러서는 더 오래, 더 사랑스럽게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러나 애무의 여운은 그것을 느끼는 순간, 멈추어버렸다. 내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고, 숨결이 높아졌다가 푹 꺼지듯 내려앉았다. 나는 목을 졸린 듯 흐느끼다가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감각과 의식을 잃었다.

란-조셉 셰리든 레퍼뉴, '카르밀라' 中 고치기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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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page기이하고 아름다운 내 친구는 한 시간 내내 냉담하다가도 어느새 내 손을 잡고 다정히 어루만질 때가 있는데, 그때는 좀처럼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약간 홍조를 띤 얼굴, 나를 쳐다보는 나른하면서도 이글거리는 눈빛, 드레스가 살랑거릴 만큼 가쁜 숨결, 그것은 연인의 열정과도 같아서 나를 당혹하게 했다. 혐오스러웠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흡족한 눈빛으로 나를 끌어당기고 뜨거운 입술로 내 뺨 구석구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거의 흐느낌에 가깝게 속삭였다. 
"너는 내 거야. 내 것이어야 해. 너와 나는 영원히 하나야."

란-조셉 셰리든 레퍼뉴, '카르밀라' 中

꺄악 >ㅁ<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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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page내가 그 문제로 끊임없이 그녀를 성기시게 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그쳐 묻기보다는 교묘하게 기회를 엿보았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한두 번 직설적으로 물은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무슨 수를 써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으르고 달래고, 어떤 방법도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대답을 회피하는 방식은 너무도 구슬프고 애원에 가까우리만큼 상냥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무수히 그것도 열렬히 말하면서 내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고 약속했다. 그랬기에 그녀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해도 내가 그것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았음을 여기서 덧붙여야겠다. 
그녀는 종종 내 목을 끌어안고 뺨을 부비면서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얘, 마음이 상했구나. 내 정신력과 심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해서 나를 잔인하다고 생각지는 말아줘. 너의 어여쁜 마음이 상처를 받으면 내 거친 마음에도 피가 난단다. 너의 따스한 삶 속에서 나는 굴종하며 사는 황홀을 맛봐. 너도 내 안에서 죽을 거야. 달콤하게 죽을 거야. 어쩔 수 없단다. 내가 네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너는 다른 이에게 가까워질 거야. 그렇게 사랑인 동시에 잔인한 환희를 배우는 거지. 한동안은 나와 내 것에 대해 더 알아내지 못할 거야. 하지만 사랑스러운 네 영혼으로 나를 믿어주렴." 
그렇게 열정적으로 말할 때면 그녀는 떨리는 손길로 나를 더 세게 껴안고 부드럽게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왜 그리도 흥분하는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멋쩍은 포옹이 있을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길에 따르면서도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맥이 풀려서 그러지도 못했다. 귓가에 자장가처럼 전해지는 그녀의 속삭임이 도망치려는 나를 황홀경으로 이끌었고, 언제나 그녀가 팔을 놓아주고 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란-조셉 셰리든 레퍼뉴, '카르밀라' 中 고치기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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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page야브투흐와 도로슈가 돌아갔고, 호마는 또 혼자 남았다. 모든 것이 똑같았다.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그는 잠시 서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시체의 관은 여전히 교회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무섭지 않아, 죽어도 무섭지 않아!"그는 전처럼 주변에 원을 그렸고, 생각나는 대로 구마 주문을 전부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소름끼치는 침묵 속에, 촛불이 깜박이며 교회 전체를 환히 비추었다. 그는 성경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러나 문득 자신이 성경을 잃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려움 속에서 성호를 긋고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금은 용기가 났다. 기도문이 시작되었고, 빠른 속도로 책장이 넘어갔다. 돌연, 정적 속에서 굉음과 함께 관의 쇠뚜껑이 확 열리더니 시체가 일어섰다. 전보다 더 끔찍한 광경이었다. 시체의 이가 맞부딪쳐 덜덜거렸고, 일그러진 입술에서 새된 소리의 거친 주문이 쏟아져 나왔다. 소용돌이가 일고 성상들은 바닥에 떨어졌으며, 유리창이 산산이 깨졌다. 돌쩌귀에서 문이 떨어져 나가자 무수한 괴물들이 교회 안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교회 안은 온통 날갯짓과 발톱 긁어대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모두가 날아다니며 호마를 찾아내려고 법석이었다.호마를 사로잡은 황홀경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졌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기억할 수 있는 기도문을 되풀이해 외우기 시작했다. 주변에 쇄도하는 악령들 소리가 들려왔다. 날개와 역겨운 발톱이 몸에 닿을 듯 스쳐갔다. 호마에겐 그들을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그가 본 것이라고는 숲처럼 털이 뒤엉킨 거대한 괴물이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자였다. 북슬북슬한 털 사이로 오싹하게 번뜩이는 두 개의 눈동자, 약간 치켜올라간 눈썹. 그 위로 거대한 거품 모양의 뭔가가 허공에 매달려 있엇고, 그 한복판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집게발과 전갈의 독침이 뻗어 나왔다. 그것들은 한꺼번에 그를 노리며 찾아다녔지만 마법의 원에 둘러싸인 그를 볼 수는 없었다. "비이를 데려와! 가서 비이를 데려와!"

란-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비이' 中 고치기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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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page키예프의 아침, 브라츠키 수도원 정문에 걸린 신학교의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순간, 마을 곳곳은 바삐 움직이는 어린 학생들과 신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문법학도와 수사학도로 구성된 하급생, 철학도와 신학도로 구성된 상급생들이 저마다 옆구리에 교재를 끼고 강의실로 몰려들었다. 아직은 앳된 얼굴의 문법학도들은 나란히 걸어가면서 서로를 밀치기도 하고 날카로운 고음의 목소리로 욕설을 주고받았다.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너덜너덜한 옷차림인데, 그들의 호주머니에는 언제나 양의 척골 조각이나 가죽피리, 먹다 남은 파이나 이따금씩 조그마한 참새 새끼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교실에서 느닷없이 참새가 짹짹거리는 날이면, 수도사 선생에게 자 혹은 벚나무 가지로 손바닥을 맞았다. 그에 비해 수사학도들은 조용히 걸어가는 편이었다. 이들의 옷차림은 꽤 단정할 때가 많은데, 얼굴에는 거의 예외 없이 수사학적인 표현처럼 모종의 장식을 하고 있다. 이마 바로 아래에 있어야 할 한쪽 눈이 다른 데 있다거나 입술에 커다란 물집이 있거나, 어떤 식으로든 분명한 표시가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테너의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말하고 욕을 한다. 철학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목소리는 한 옥타브 낮다. 이들의 호주머니에는 독한 담배 말고 아무것도 없다. 먹을거리를 따로 챙겨오지 않지만 즉석에서 손에 넣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치운다. 이들이 내뿜는 파이프 담배와 보드카 냄새가 얼마나 독한지, 지나가던 노동자가 발길을 멈추고 경찰견처럼 오랫동안 허공에 대고 코를 킁킁거릴 정도다.

란-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비이' 中 고치기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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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page바버라가 그를 이층으로 데려왔을 때 나는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어. 사내가 말하길, 자기가 모시는 매우 고귀한 부인이 지금 임종의 순간에 신부를 뵙고자 한다는 거였어. 나는 곧 가겠노라 대답하고, 병자성사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아래층으로 서둘러 내려갔네. 문밖에선 밤처럼 새카만 말 두 필이 초조히 땅을 박차면서 콧구멍으로 김을 내뿜고 있었지. 사내는 말고삐를 잡아주고 나를 먼저 말에 태운 다음, 다른 말에 올라타서 안장 앞머리에 능숙하게 한 손을 올려놓더군. 그러고는 말 옆구리를 양 무릎으로 지그시 누르고 말고삐를 놓았어. 말들이 쏜살처럼 달리기 시작했네. 내 말의 고삐를 그 사람이 잡고 있어서 말 두 필이 똑같은 속도로 질주했어. 발밑으로 땅이 잿빛 줄무늬처럼 미끄러졌고, 나무의 검은 그림자들은 퇴각하는 군대처럼 멀어졌지. 숲속이 너무 어둡고 쌀쌀해서 미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듯 온몸에 전율이 일더군. 말굽이 돌에 부딪치면서 불꽃이 일었고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 불의 꼬리가 길게 늘어졌어. 그 시간에 누군가 우리를 보았다면 몽마(夢魔)에 올라탄 유령들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때때로 길 위로 도깨비불이 날아다녔고 무성한 숲에서 갈가마귀가 오싹하게 울어대는가 하면 간간이 들고양이의 눈알이 번뜩이기도 했어. 갈수록 말이 난폭하게 머리를 치켜들었네. 말 옆구리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콧구멍에서 뿜는 숨소리도 몹시 빠르고 거칠었지. 그러나 말들이 지쳐가는 것을 본 사내는 사람의 목소리 같지 않은 괴상한 고함을 질러 말들을 재촉했고, 광란의 질주는 다시 이어졌네. 마침내 맹렬하던 질주가 끝나는가 싶더니, 여기저기 불빛이 비치는 검은 건물이 난데없이 눈앞에 버티고 있더군.

란-테오필 고티에, '죽은 연인' 中 고치기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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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page어느새 마을이 가까워졌어. 해가 저문 지 삼십 분쯤 지나고부터, 약간은 요란스레 산간과 계곡에 메아리치는 교회 종소리가 선량한 사람들에게 하루가 저물었음을 알리고 있었지. 안젤로는 갈림길에서 잠시 멈춰 섰어. 왼쪽은 마을로 가는 길이었어. 골짜기로 향하는 오른쪽의 오솔길은 밤나무들로 드리워져 있었지. 그는 닳아빠진 모자를 벗고 잠시 가만히 서서 서녘으로 빠르게 희미해져가는 바다를 응시했어. 그러다가 익숙한 저녁 기도문을 조용히 읊조리듯 입술을 달싹였지.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머릿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채 다른 것으로 바뀌었고, 곧이어 우렁차게 이름 하나를 부르는 것으로 끝을 맺었어. 크리스티나! 그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의 의지는 순식간에 허물어졌어. 현실은 사라졌고 다시금 꿈에 사로잡힌 그는 몽유병자처럼 민첩하고도 확신에 차서 밑으로 밑으로, 어둠이 모여드는 가파른 길을 내려갔어. 그 곁에서 함께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크리스티나가 귓가에 기이하고도 달콤한 말을 속삭였지. 그가 깨어 있었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말이었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평생 처음 들어보는 가장 경이로운 언어였지. 그녀는 그에게 키스했지만 입술에 한 것은 아니었어. 그는 자신의 하얀 목에서 그녀의 날카로운 키스를 느꼈고, 그녀의 입술이 빨갛다는 것을 알았지.

란-프랜시스 매리언 크로퍼드, '피는 내 생명' 中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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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을 때까지, 책 초반에 나왔던 옮긴이의 서문과 표지에 나온 지은이의 이름을 끝끝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1500년대 시식시종으로 일했던 우고 디폰테의 이야기'이고, 지은이 역시 '우고 디폰테'이고, 자칭 옮긴이는 이 글이 씌여진 문서를 '발견하여' 옮겨 적는다고 썼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어지간한 소설 뺨 칠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흥미로운 이야기였고 솜씨있는 글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주인공을 넣어 만든 소설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니면 저자의 이름이 붙은 표지 따위가 소멸해버리고 본편만 남았는지도 모르지.

시식시종이란, 생명의 위협을 받을 여지가 있는 고귀한 신분의 사람에게 식사 때마다 붙어 독이 들었는지의 여부를 감별하는 시종을 뜻한다.
풋풋했던 시절 겪었던 사랑과 행복, 뒤이은 절망..그리고 높으신 귀족의 변덕에 의해 갓난아기인 딸과 죽을 뻔하다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그의 시식시종이 되고, 점점 신임을 얻어가는 과정과..어여쁘게 자란 하나뿐인 딸을, 그녀를 탐하는 주인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목숨걸고 고군분투한 모습을 그린, 늙은 우고의 자서전이다. 이게 정말 실존인물이 직접 쓴 자서전이 맞다면, 영화를 연상시키는 스펙터클한 삶이랄 밖에..
순박하게 와닿는 문체가 이야기 전개에 드러나는 주인공의 성실함과 어우러져 여기저기 긴박한 상황들 속에서 우고 디폰테를 딱 전형적인 주인공 틱하게 만들었다는 느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 기대도 없이, 순전히 표지만 보고 집어들었지만 꽤 재밌게 읽은 책.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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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집어들면서 영화버전 케니 역인 니콜라스 홀트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실은 그 호기심이 크게 작용했던 것도 같다. 그다지 기대하며 집어든 책도 아니었지만, 읽어가면서 뒷표지에 실린 줄거리를 읽어버린 것을 꽤 후회했다.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읽어나가는 것이, 더 자세한 내막들을 기대하며 읽어나가는 것보다 훨씬 좋았을텐데. 그런 기대가 몰입을 좀 방해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문체부터 즐기며 읽은 책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진지하고. 소소한 면들까지 솔직하고 섬세하게 감지할 줄 아는. 사려깊은 마음, 억지스럽지 않은 낙관이 여기저기 세심하게 묻어있었고-그런 점들이 귀엽게 느껴져서 좋았네...-__-ㅋ(그래봤자 번역체잖아? 하는 얘기를..;)

마지막은. 
작가가 건네고 싶은 말을 마치고, 더 이상 전개를 늘려보았자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머니에서 스르륵 흘러나와서는 무척이나 생생하게 움직이다가 도로 스륵 되돌아간 것 같은. 조금은, 들여다보다 밖으로 밀려난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이런 결말도 나쁘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퀴어로서의 삶을, 조지의 눈을 통해 나름 상세히 볼 수 있었다. 충분히 암울할 수 있고-그런 우울이 아주 드러나있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상황들을 통찰하면서 고스란히 경험으로 받아들이고..기운을 내고..일탈도 꿈꾸고..가능성을 열어두려하고..마냥 고통의 감각에만 예민하게 집중하지 않고 우울의 구렁텅이에 온종일 허우적대지 않는 중년의 조지는 읽는 내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니, 실상은 조지를 통해 본 작가가 그랬지. 
귀여운 작가할부지. 이름을 기억해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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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page조지는 마음을 편안히 먹고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친구 집에 숨을 헐떡이며 도착하면 부끄러울밖에.) 이렇게 집 밖으로 나 있는 계단이 이 동네의 특징이다. 예전에 칠해진 문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계단도 있다. 이곳에 살던 보헤미안들은 손님이 술에 취해서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계단을 올라갈 경우에 대비해서 경고의 문구를 계단에 적었던 것이다. '위로 전진!' '약해지면 안 돼.' '몸이 형편없군. 운동해.'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이곳이 천국일 리 없잖아!'

란이거 보고 소리내서 낄낄 웃었다. 와..좋은데.

좋았던 글귀를 일일이 따오자면 끝이 없겠다; 지나치게 감상적이 된 듯; 앞부분도 이보단 훨씬 많았지만-뒷부분은 이런 식이면 죄다 옮겨 쓸 것 같아서. 여기서 끝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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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page두 사람은 말이 없다. 친밀하게 씩 웃고 있을 뿐이다. 조지는 이 이중적인 대화가 서로를 더 가까이 이해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그 '이해 못함'과 서로 엇갈린 목적인 그 자체만으로도 친밀함으로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케니는 연필깎이 값을 치른 뒤, 친구에게 하듯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한다.
"또 뵈어요."
케니가 서점을 나간다. 조지는 케니를 뒤쫓는 듯이 보이지 않으려고 잠시 서점에서 서성거린다.

란케니와 조지의 관계는 미묘한 부분을 드러내기도 하고, 일그러지기도 하면서 조지의 이런저런 정체성-중년기, 교육자로서, 성적 정체성에 이르기까지..??-을 다시 환기시키고, 조지로 하여금 그의 삶을 다시 긍정하게 만드는 자극이 되기도 하는데. 작가가 둘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은 끝까지 억지스럽지도 않고 무리도 없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뭔 말을 하는건지;) 고치기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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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page조지는 이 젊은이들의 아름다움에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두 젊은이는 절대 모르겠지만, 이들 덕분에 조지는 지금 이 순간을 경이롭게 느낄 수 있고, 인생을 덜 미워하게 되고...

란안구정화를 맛보는 조지. 
세상은 넓고 예쁜 사람들은 많고. 닥저 스킬을 발휘할 때가 떠올라 어쩐지 동감.. 
조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하며 속을 끓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기뻐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하긴. 오랜 시간과 경험이 준 강함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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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page'안 돼.'
(이 시점에서 조지의 눈썹은 평소에 아픈 경련을 일으킬 때보다 심하게 찌푸려진다. 입술은 칼날보다 가늘어진다.)
안 돼. '재미'라는 말을 쓰면 안 돼. 이 사람들은 재미있지 않아. 이 사람들을 절대로 재미와 결부시키면 안 돼. 그런 사람들을 다룰 방법은 한 가지뿐이야. 잔인한 폭력.
그러므로 체계적인 테러를 일으켜야 해. 효과를 높이려면, 고도로 훈련된 자객과 고문 담당자가 적어도 오백 명은 필요해. 모두 헌신적인 사람이어야 해. 테러 조직의 우두머리는 확실하고 단순한 목표, 가령 그 아파트 건물을 제거하거나, 그 신문사를 압박하거나, 그 상원의원을 은퇴시키는 것 등의 목표를 세워야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사상자가 몇 명이나 생기든, 순서대로 목표를 수행해야지. 테러마다 가장 중요한 표적은 맨 처음에 정중한 편지를 받게 되겠지. '조지 아저씨'라고 서명이 되어 있고, 살아남으려면 마감 시간까지 꼭 해야 하는 일을 정확히 적은 편지. 그 편지에는 조지 아저씨가 죄를 처단하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 설명도 적어야지.
...
그러나 조지 아저씨는 정말 그것을 바랄까? 사람들이 모두 쓰레기일 뿐이고 그 대부분이 죽는 것이 낫다고 해도, 처형을 계속하는 것 역시 하나의 도전인데, 조지 아저씨는 그런 도전을 좋아할 수 있을까? 조지가 마지막으로 내린 분석. 그 모두가 짐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 사람들은 짐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그 사람들의 말, 그 사람들의 생각, 그 사람들의 생활양식, 그 모두가 짐을 죽게 했다. 그러나 조지가 이런 생각에 깊이 빠져 있어도, 짐은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다. 짐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미국 인구의 4분의 3을 증오할 변명거리일 뿐이다.
...
그러나 조지가 정말 그 사람들 모두를 증오할까? 그 사람들은 그저 증오에 대한 변명거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조지의 증오는 무엇일까? 그저 자극제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조지에게는 아주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분노, 적개심, 원한. 이런 것들이 중년에게는 활력소가 된다. 바로 이 순간, 조지가 미쳤다고 말한다면, 조지 주변의 수많은 자동차들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 최소한 여섯 명은 조지와 마찬가지로 미친 상태일 것이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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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이야기"에 수록된 단편들은 예상과 달리 '비이'와는 전혀 다른 소설들이었다. 책 뒤편에 소개된 작가의 생애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야 고골의 작품들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는 걸 알았다. 
첫 시집이 실패하고 갖은 고생 끝에, 우끄라이나의 어린시절 들은 민담들을 토대로 쓴 "지깐까 근처 마을의 야화"가 성공을 거두면서 속편격인 소설들을 썼는데, 환상적 낭만주의 느낌이 나는 소설들이 나온 이 때를 우끄라이나 산문 시대라고 부른댄다. ('비이'는 "지깐까 근처 마을의 야화"의 속편인 "미르고로드"에 수록된 4편의 소설 중 하나다.)
이후 1835년 이후로 고골은 러시아 민중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소재들을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해냈는데, 이런 소설을 쓰던 때를 낭만적 사실주의 시대라고 한대나. 이 책에 실린 코, 외투, 광인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 가 그 시기의 소설들이라고.(고골 이전만 해도 황제나 귀족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들이 있었지, 민중을 대상으로 한 소설은 이 시기가 거의 처음이랜다.) 

'비이'같은 환상동화를 기대하고 빌렸고, 예상이 엇나갔지만 나름 이쪽도 나쁘지 않았다. 실린 작품들 전반적으로다가 당시 서민들의 찢어지게 가난한 삶과 퍽퍽하고 우스꽝스러운 관료, 계급주의에 대한 조소, 예술의 신성함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이 일관되게 그려져 있다고 느꼈음..

고골은 1809년 생이다. 네이놈 백과사전을 뒤지자면 18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났고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진격해오면서 그 혁명 정신이 러시아에도 이래저래 영향을 주던 시기였다니 그가 1852년에 죽기 전까지 그의 작품 안에는 그런 시대상이 반영되었다고 봐야겠다. (+당시 러시아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극히 보수적인 전제군주제와 경직된 관료주의 체제가 횡행하고 있었고, 유럽권 통틀어 농노제가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기도 했다. 위로부터의 정책으로 산업은 발달해갔지만 서민들의 삶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고, 크고 작은 폭동이 끊이질 않던 시기였다. 교육.문화.언론에 대한 통제가 극심했지만 유럽으로부터 낭만주의와 사회주의사상이 유입되었고 나폴레옹 전쟁 후 시민의식도 성장, 사상계가 유래없는 활기를 띄던 시기였다고.)

-----(끄적끄적 주저리주저리. 스포일러..)
<코.>
계급에 죽고 못사는 관료놈들, 저 오만한 코를 베어주갔어. 꼴이 어드러한지 보디. 그래봤자 나도 알지-니들이 변하갔어? 이런 느낌의 소설이었뜸.
<외투.>
고골은 한때 관리가 되겠다고 내무부에서 잠깐 일했던 경험이 있는데, 엄청난 박봉이었던지라 3개월만에 옮겼다는 얘기가 있다. 그때의 경험담 같은 소설인 듯. 계급을 무지 중시하는 가운데서도 계급 피라미드를 떠받치고 있는 하급관리의 삶 역시 당시 서민들처럼 궁핍하긴 마찬가지였던 모양.
<광인일기.>
각박한 계급주의적 현실에 고민하다가 아예 현실을 외면해버리는 주인공 이야기. 안타까운지고. 하지만 요즘 나오는 8시 반 드라마들에서도 경제적 신분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사랑 얘기가 즐비하다네..

>여기까지는 읽는 게 좀 힘들었다. 시린 손 호호 불며 잠에 취한 충혈된 눈으로 감기걸려 지끈거리는 머리를 벽에 박아가며 쓴 글 같다고 생각했다. 당장 먹을 빵 구하려고 단어 수 눈대중해가며 꾸역꾸역 쓰고서는 동 트자마자 출판사에 던지고 돈으로 바꿔왔을 듯한. (근거라고는 전혀 없음.) 푹 빠져 읽기엔 전개들이 산만하고, 소개에선 유머러스하다는데 그것보다는 조소가 많은 것 같고..하나같이 좀 악에 받친 듯한 느낌. 괴로웠어..
<초상화.>
>이 책에서 제일 몰입도가 큰 소설이었음. 마음에 든다.
신으로부터 오는 신성함의 투영인 예술작품과,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가난하고 심지 굳건한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동경. 긍지와 궁핍이 버무려진 고달픈 작품활동.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서민들의 몇 푼 안되는 돈을 우려먹는 냉혹한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한 혐오가 담겨있는 듯. 이야기 자체로만 봐도 꽤 스릴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있는데, 1부에서는 가난하고 재능있는 젊은 화가가 기묘하고 섬뜩한 어느 노인의 미완성 초상화를 산 뒤 경제적으로 흥하는 유명화가가 되지만-추구하던 고매한 정신세계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종내 살벌하게 타락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2부에서는 초상화에 얽힌 뒷 이야기가 밝혀진다. 1부에서 젊은 화가가 초상화를 산 뒤 꾸는 꿈에 대한 묘사와, 동료 화가의 그림을 보고 그때까지의 허울뿐인 삶에 회의를 느끼며 좌절하곤 무서운 기세로 타락해가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정말 대단했다. 2부에서는 1부의 화가와는 대조적인 신앙적으로-예술적으로 경지에 오른 화가의 모습이 묘사되는데, 알흠답고 가치있어 보인다는 데 동감하지만 한편으론 훗날 발현할 고골의 심리적 위험요소가 여기서 언뜻 보이는 것 같다. 고골 역시 "죽은 혼"을 집필한 후로 후속편에서 주인공의 구원을 그리려다 실패하고는 신이 자신에게서 구원적 면모를 거두어간 거라며 뚜렷하게 광신적으로 변해갔다고 하니. 딱 '초상화'에 등장하는 화가들이 매달렸던 것이나 그의 생이나 다름이 없지 않나..
<네프스끼 거리.>
시간별로 다른 양상을 띄는 네프스끼 거리의 하루. 
서로 다른 두 여인의 뒤를 좇는 두 사내가 겪는 이야기. 
화가 삐스까료프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내려받은 듯한 여성을 보고 홀린 듯 그 뒤를 좇지만-그녀는 나태와 천박과 돈에 집착하는 마음이 뿌리깊게 박힌 창녀다. 그는 그녀의 고결한 미모와-그와 완벽히 반하는 그녀의 실제 모습 사이에서 갈등한다.
막 5급 중위로 진급한 그의 친구, 중류계급의 일원인 삐로고프는 그와 대조적이다. 
교양이 풍부하고 능글능글 유머러스한데다 뻔뻔함까지 갖춘 이 작자는 좇아 간 여인이 유부녀인 것엔 아랑곳도 않는다. 끊임없이 뻔뻔하게 수작을 하다 여인의 저항소리에 뛰어온 남편과 그 동료들에게서 아주 거친 경험을 한다. 하지만 관료를 상대로 거친 짓을 했다며 때린 쪽은 안절부절하는 반면, 애초에 불씨를 제공한 당사자는 계급을 이용한 복수를 하겠다고 벼른다.
고골은 양 쪽의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네프스끼 거리를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람들을 우롱하는 운명, 그리고 겉모습만으로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허위와 기만이 넘치는 거리라고./ 거리를 지나는 번지르르한 사람들의 이면에 숨은 계급과 빈부의 격차. 매력적인 외관만큼 비싼 돈을 요구하는 상품들.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생활동안 그의 마음에 있던 이야기일듯 싶다. 화려하고 쾌적해보이기만하는 아름다운 도시 중심부의 냉랭한 이면. 고결한 미모의 여신님도 계급과 돈이 따르지 않는 한 어울리는 고결한 삶을 살아갈 수 없고-억울한 사연도 돈과 계급 간의 이해관계에 얽히면 그저 숨죽여 끌어안을 밖에 도리가 없는...이라고 생각했지만 잘못 짚었음. "오월의 밤" 해설에서 보니, 고골은 평생 실제 여성과의 연애나 결혼을 꺼렸다고 한다. 결혼 자체에 대해서도 공포스러워해서 여동생들의 결혼을 이유없이 막기도 했다고. 이 단편에서도 여신적인 면으로 추앙되거나-멍청하거나 혐오스런 죄악의 근원, 같이 비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걸 보면 고골의 여성관이 얼핏 보이는 듯. 거세공포증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족으로..이 단편, 아무리 외모가 맘에 들었다손 쳐도, 애초에 왜 몰래 따라가냐..싶은 내용이기도 하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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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우물. 평생 남장을 하고 살았다는 래드클리프 홀의 자전적? 소설이다. 
런던에서는 한동안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미국에서는 논란은 되었을지언정 금서까지 가진 않았다고.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을 살다 간 작가와 비슷하게 주인공 스티븐 역시 비슷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막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혼의 짝 메리와 함께 친구들과 교류하고 고통을 함께 감내하고 하는 부분을 읽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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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서 본 레즈비언 퀴어 소설 추천목록을 보고 골랐더랬다. 
읽어나가다 느끼는 건데. 이건 명백히 F>M 트랜스젠더의 관점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완벽하고 나무랄 데 없는 남자가 여성의 육체를 타고 나서 겪는 당황스러운 성장기가 1권에서 충실히 그려지고 있다. 성동일성 장애를 겪는 이들은 저렇게 느끼는건가. 근데 스티븐의 경우는 아주 상징적인 인물이라. 당시 남자들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비상한 두뇌. 가공할 신체적 능력. 부유함. 이런 게 없는 경우를 떠올려보게 된다. 그들의 삶은 더한 자기혐오와 의혹과 경멸로 점철되어 더 궁색하고 비참했겠지.
스티븐의 아버지는 꽤 멋진 인물이다. 작가의 이상을 반영한 것 같기도 하다.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삭막한 미래에 대비시키려 이런저런 공부와 운동을 배우게끔 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칭찬해주고 어떻게든 고립되지 않게. 친구를 사귀게 부추겨주고-그게 비록 실패로 끝나게 됐대도. 끝끝내 자기 아이에게 알고 있는 바와 속내를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한 것이 주인공의 삶엔 꽤 큰 자산이 되어주었다.
스티븐에게는 아버지 외에도 두 명의 가정교사가 있고. 그녀의 말 래프터리와 마부 윌리엄스가 있어 성장기 내내 철저한 고독과 연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스티븐을 풍성하게 사랑하고 존중해주었으니까.
간간이 비참해하는 주인공에게 동정하면서도 은근 그런 점이 부러웠다. 수천 명의 동료를 위해 힘을 내라고 격려하는 푸들이나. 그러겠다고 가끔 다짐하는 스티븐이나. 그렇게 상대적으로 나은 점들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부터 성소수자들에 대한 연구들이 체계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고-결코 호의적이진 않았을게다. 스티븐은 카인의 낙인이 찍힌 사람이라는 말을 인용하곤 하면서도 스스로의 존재자체에 대한 혐오에 빠지거나 하진 않는다.
사랑의 힘이다. 부유한 덕도 있고. 작가는 이 책을 내고 다시는 동성애를 심도있게 소재로 다루지 않았지만. 스티븐은 아마도 끝까지 당당하게 싸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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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후 파리 편에선 스티븐이 동류로 여길만한 이들이 등장하는데. 거기엔 스티븐과 달리 뚜렷한 외형적 특질을 보이지 않는 레즈비언커플도 있고. 게이스러운 인물도 있고. 불륜 커플도 있고. 양성애자로 보이는 인물도 있다.
LGBT의 옛 회동이라고 보면 되려나. 작가 역시 이런 사람들과 교류하고 영향 받았을 것 같다. 용기도 냈을 것 같고. 오랜 역사가 요즘의 큰 흐름의 기반이 되었겠지. 뭉쳐서. 끊임없이 교류하고 힘을 내고. 변화를 이끌어내고 그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종종 지루해서 책이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인물들의 심리가 홱홱 크게 변화하는 국면이 오면 다시 몰입하게 된다. 금서가 되고. 좌절했을 작가를 생각하면 책을 덮을 순간이 좀 꺼려지기도 한다.
아주 약간. 캐릭터에 대해 더 말하자면. 스티븐은 타인의 시선으로 받는 충격을 제하면 내부적으로는 아주 건강한 인물인 것 같다. 용맹하면서도 유하고. 숲과 꽃과 동물을 사랑하는 온화하고 성품의 인물이다. 풍성하고 유한 느낌.
스티븐 뿐 아니라 작가가 사물과 풍경을 묘사하는 방식이. 그런 느낌을 준다. 풍성하고 유하고 온화하고 섬세한. 그러면서도 약간음 펜싱하듯 과감하게 질러낸 듯한 부분들도 보이고. 작가도 스티븐처럼 행복을 나눌 사람이 있었길 바라게 되는데. 책을 덮고 나서 작가의 삶에 대해 찾아보고 싶다. 타인에게는 뒤틀렸을지 몰라도 자연이 빚어낸(농간을 부렸을진 몰라도) 산물이자 사랑의 결실로서 스스로에게 당당한 스티븐은 계속 메리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계속 읽어봐야겠다. 근데 남은 부분이 길어서. 좀 불안해진다. 사실이 어찌되었든 이런 얘기는 해피엔딩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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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때 성소수자들도 기꺼이 조국을 위해 싸웠고 존재가치를 입증하려 애썼다..는 것. 스티븐은 여성이라 징집대상이 아님에도. 프랑스에 배치된 부상자 후송부대에서 비슷한 이들과 함께 최선을 다했고 영예로운 공을 세웠다.
사지로 자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애국심이야 이해하기 어렵지만서도. 여튼 인상적인 대목이었다. 게이친구가 그 사람 특유의 언행은 버리지 못하면서도 제대로 자원해 전쟁을 끝까지 수행한 것도 그렇고. 전쟁터에서 싹튼 사랑. 도 좋지. 그 부분 서술이 좀 더 길고 스펙터클했으면 더 좋았겠기도. 그럼 너무 길어지려나. 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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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잘나가길 바랐던 둘의 관계는 한때 스티븐에게 청혼까지했던 친구 마틴이 끼어듦으로써 끝나버렸다. 스티븐은 마틴이 메리에게 줄 수 있는 미래-사회적 시선, 가족에 대한 욕구 등을 자신을 줄 수 없다고 번민하다 취약하게 무너져버렸다. 발레리에게 빠진 척하고 메리가 떠나자 자살을 택한 듯하다.
존재의 권리를 얻고자하는 시달리고 음울해진 인간들. 술과 약과 가난에 찌들려 비틀거리다 죽어간 인간들. 스티븐은 결국 그들에게 둘러싸여 신에게 구원을 갈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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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 작품이고. 성혁명 관련해서는 진보덕이지만 인종차별적이고 귀족주의적이며 파시즘적이라는 평이 있다. 부치타입을 부각시켜 문화적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고 퀴어들을 불행할수밖에 없는 자들로 비참하게만 그렸다는 비판도 있다.

금서판정을 둘러싼 재판으로 홀은 집을 팔았고. 버지니아 울프나 E.M. 포스터 등의 블룸즈버리 그룹과 울프의 동성연인 비타색빌 등이 책을 금서에서 구제하기 위해 함께 애썼다고 한다. 모더니즘 문인들의 일대사건이었다는 듯. 
28년.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틸다언니가 주인공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그것.)와 같은 해 발간. 
저자 생전 100만부 이상이 팔렸고 11개국어로 번역되기도 했다고. 
홀 역시 파리 래프트뱅크에서 발레리 모나한의 모델인 나탈리 바니를 주축으로 한 문인들과 자유롭게 지냈다고한다. 거트루드스타인. 지젤프로인트. 듀나 아이디의 근간이 되는 듀나번즈 등이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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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는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썼을 듯한 소설이 나온 후로 우여곡절이 있었고, 홀은 다시는 이런 글을 쓰지 않았다지만,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고생고생하여..오늘날에는 꽤 성과를 이루어냈다. 결혼도. 아이도. 사회적 시선도. 거칠 것 없는 시대가 점점 도래하고 있잖은가.
더 이상 그들은 우울하지만은 않다. 밝고 재치있게 잘 살아가려는 이들로 모임들이 북적이는 듯하다. 아직 한국은 갈길이 멀었지만. 언젠가 이 책을 처음 읽는 이들이 후반부를 얼떨떨하게 덮을 날이 오겠지.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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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가가 고인이 되셨다는 소식을 읽었다.
발란더 시리즈를 영드갤에서 처음 접하고 나서 줄곧 책을 읽어봐야지..했었는데.
잊어버리지 않게 일단 구매목록에 담아둔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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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순수문학 소설. SF나 환상문학과 순수문학을 가른다는 게 애매모호한 일이기도 하고 웃기긴 한데. 여튼. 
한강을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몽고반점에서 처음 접하고 나서. 같은 문학상 수상집 안에 있던 아기부처도 읽었고. 이후로 학교 도서관에서 그대의 차가운 손.도 부러 찾아 읽었더랬다. 고요하고. 묵직하고. 덤덤하고. 고통과 고독이 예리한 사금파리처럼 섞여 있는 공기를 차분히 들이쉬고 내쉬며 살아가는 사람들. 살아내는 사람들. 거기 빠졌던 것 같고. 그 후로 여수의 사랑. 같은 단편집을 사기도 했다. 
간만에 책을 빌리고 싶어져서 도서관에 들러서. 찾아본 작가가 한강과 성석제였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그려냈다는 책은 좀 머뭇거렸고. 이 책을 빌렸다. 성석제의 투명인간은 누가 빌리고 없더라. 
몽고반점. 그대의 차가운 손. 예술가가 등장하는 소설들이었는데.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진저리나는 생을 형상화하고. 무언가를 치열하게 추구하고. 매혹되고. 갈구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살아내기 위해 없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조소와 회화 작업들. 흔적들. 파리하게 연약하고 예민해서 부서져버리는 사람들이 남기는, 그들 자신보다 오래도록 남아 그들을 대변하는 것들.

삶의 지난하고 싸늘한. 오랜 시간에 걸쳐 무자비한 피멍을 남기고 비쩍비쩍 말려죽이는 겨울같은 속성. 위태롭고 따스한, 부들거리고 당장 사그라들 것만 같은 가냘픈 사람들, 그들이 미쳐 매달리는 온기. 이 모든 피로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갈 삶. 

이럴 줄 알았는데 집어왔다. 7,80년대를 그렸던 지난 단편선도 읽다가 몇 번이고 지쳤었는데. 하지만 위로가 된다.

말러의 2번 교향곡. 그게 등장한 대목은 정말이지. 적나라했다. 단어를 고르자니. 그냥 적나라했다는 단어가 제일 와 닿는다.

천체물리학을 전공했다고 나오는 이동주의 그림. 그리고..
존재가 0에서 무한대로 바뀌어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시작되었고. 몇 번이고 다시 수축하여 무한대는 0으로 바뀌었으며..다시 무한대로 팽창하는 역사가 계속되었기에...우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하는 우주와 존재의 시작과 소멸에 대한 물리학 구절들이 이 소설을 휘어잡고 있다. 태초의 우주를 증거하는, 검은 먹물같은 암흑에서. 점점이 태어난 흰 빛. 핏줄처럼 암흑을 서서히 퍼져나가는 빛의 흐름. 그리고 잔잔히 부서져 다시금 흑암과 합쳐져 나가는 파장의 끝.

겨울은 시작되려는 중인데. 책을 덮고 나자 이미 마음에 가득 들어차있다. 
찬 바람 부는 마시령고개의 위태한 눈 도로를 떠올리면서도. 나 역시 배를 끌며 찬 바닥을 기어나와 숨을 내쉴 것임을 안다. 이렇게까지 미친듯한 면모는 아니지만, 이미 많이들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p.44

삼촌으로부터, 그리고 삼촌이 읽던 책들로부터 배운 바에 따르면, 우주의 시작은 양자역학적인 물리량이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앞뒤를 따질 수 있는 고전적인 시공간은 태초 이전에는 무의미하다. 고전적인 우주가 태어나기 전까지우주의 에너지는 0이지만, 시공간은 양자역학적 혼돈 상태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그러던 어느 확률적 순간, 에너지의 벽을 뚫은 시공간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고전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적용된다. 오랜 혼돈이 갈라지고 천지가 창조되는 짧은 시간, 우주는 급팽창하고 물질이 생성된다. 놀랍도록 신화에 가깝게. 플랑크의 시간이라고 불리는 10의 -43승초, 그 찰나의 찰나에.



p.61

그러니까, 혹시...이 우주의 물질은 원래 하나인 거예요? 같은 중성자가 어떻게 양자와 결합했느냐에 따라 수소, 탄소...그런 게 되는 거예요? 이 종이랑 담벼락이랑 사람의 몸이랑 물이랑...이 모든 게?
그렇지.
삼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같은 구슬을 이렇게 묶느냐 저렇게 묶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그 순간 나는 아득해져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의 몸과 그의 몸이 같은 물질, 같은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알갱이는 거의 비어 있다고, 이 책에는...
그렇지.
그러니까, E=mc^2이란 말은...
비어 있다고 해서 그게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고,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거지. 네가 말한 건 에너지가 곧 물질이라는 등식이니까.
수증기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물이 되고 얼음이 되는 것처럼요?
적절한 예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비슷해.
그러니까, 여러 조건들, 시간까지 모두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이 세상은...한 점인 거네요. 빅뱅 이전의 한 점, 아니, 점도 아닌,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상태...그러니까, 우리가 산다는 건...
그는 웃음을 거두고 내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풍화되는 대지와 마르는 강물, 폭발하는 별들이 스쳐간 것을. 모든 것이 하나로 꿰어지는 순간의 격렬함을 경험한 것을. 슬픔도 고통도, 그렇다고 기쁨도 아닌 그 순간을.

그날부터였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 당신이 내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손의 원소가 내 손의 원소와 같다는 것을 간절하게 실감했기 때문이라고. 아니, 모르겠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다. 당신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도 단언할 수 없다. 모른다고밖에는. 모든 것이 덩어리로 다가왔다고밖에는. 스며들고 번져갔다고밖에는. 당신의 그림 속에 떨고 있던 모세혈관들처럼.


(정말 이과적인 로맨스로군. 싶었더랬지. 김보영 소설 0과 1 사이가 막 떠오르고.

삶의 헛헛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서로를 이끄는 그 허망함에 대한 이해? 같은 덧없는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오는 동질감과 연민과..위로를 닮은 끌림? 묘한 구절이라면 묘한 구절이고. 야유하고 싶어지는, 사춘기 특유의 의미부여가 과한 부분이다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래, 두 사람이 20살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동주는 소년과 다름 없는 인물이라서. 이 묘한 부분에 대한 야유를 쉽게 누르고 풋풋하게 넘어갈 수 있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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