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시효를 넘긴 70대의 연쇄살인마. 그는 젊은 시절 두 차례의 뇌수술을 받고 나서 어째서인지 살인동기를 잃은 채 한적한 산자락에 딸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자신의 전성기를 연상시키는 여성 연쇄살인마로 동네가 떠들썩해진다. 그리고 그는 우연히 마을에서 만난 젊은이가 자신과 같은 부류임을 한 눈에 알아본다. 그리고 그는 20대인 그의 딸을 노리는 것이 틀림없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죽인 여자에게서 '딸 만큼은 죽이지 않겠다'며 맹세한 뒤 홀로 키워 온 딸. 그는 수십 년 전부터 살인을 할 충동을 느끼지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살인을 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나날이 심해지는 알츠하이머가 그를 가로막는다. 그는 기억하기 위해 일지를 쓰고, 녹음을 하기 시작하지만...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불경 구절들. 인생에 대한 집착을 허망하다고 읊조리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구절이 소설의 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인생의 허망함을 깨닫고 집착을 버려 자유로워지라는 교훈을 담은 구절들이 여기서는 음산하게 반복되는 저주처럼 다가온다. 붙들고 싶지만 의지가 미치는 영역을 이리저리 숨바꼭질하다 영원히 달아나버리는 기억들, 치매의 저주.
사람의 자아나 그를 이루는 삶은 그 스스로의 인지능력에 기반한 것이다. 그것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사실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것들(새로운 연쇄살인마가 나타났다! 그가 딸을 죽이려한다!) 아주 명백한 주변 인간관계조차도(십수 년 간 키워 딸은 진정 존재했는가) 온통 무너져내리고 만다.
신기루처럼 내려앉는 세상을 두고, 어떻게 손 쓸 새도 없이, 그는 무력하게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먼지처럼 아무 동기 없이, 무기질처럼 순수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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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생각이 났다.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내.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은 복수를 해야 한다. 복수에 대한 열망만큼은 강렬하고 잊을 수 없어서, 착실하게 계획을 세우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 잊어버리고 만다. 계획의 진전을 확인하고 이어가기 위해 사진과 기록을 남긴다.. 하지만. 계획이 잘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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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로이드가 나온대서 찾아봤던 2012년 작 영국 드라마 The Fear 4부작 역시, 두목의 망각성 뇌질환으로 무너져 내리는 영국 갱조직 가문 이야기를 그렸더랬다. 치밀한 논리와 냉혹함으로 정계에까지 손을 뻗쳤던 강력하고 부유한 갱 두목이 있다. 희귀하고 치명적인 뇌 질환이 깊어져 가면서 그는 조금씩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잘못된 지시를 내린다. 정도는 점점 심해져가고, 조직 내에 상존하던 트러블들을 컨트롤하지 못하게 되면서 늦게나마 상황파악을 한 2인자들이 어떻게든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하려 애쓰지만 불법이민자로 이뤄진 신흥 갱단과의 심한 갈등으로 조직이 몰락해 가고 마는. 그런 얘기였다. 그리고 냉혹함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인간에게 둑이 터진 뒤 몰아치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죄책감이다. 잘못된 판단보다도, 그 죄책감이 그를 더욱 철저하게 망가뜨려간다. 이성의 끈이란 얼마나 쉽게 망가지고 인간은 얼마나 취약하게 망가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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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젊은이들의 경우 몸이야 이제 140~150세까지도 유지할 수 있을 거고들 하더라. 자잘한 질환을 달고 지내더라도 약이며 수술이며 잘 받으면. 굶주림이나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대도 거의 끝났고. 되려 넘치는 열량이 문제가 되는 때가 됐다. 하지만 그만한 시간을 살아가는만큼 정신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이젠 온전한 정신,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잘 파악하고 적응하는 정신이 중요한 시대다. 꼭 뇌 질환으로 인한 몰락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트라우마, 구닥다리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나날이 발전되는 새로운 사회의 필요를 소화하고 적용하지 못하는 정신은 도태되면서 갈등을 조장한다.
누구나 시대와 발맞춰 나가기 바라고, 몰락하지 않길 바라지만, 그런 병은 오래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넘치는 열량을 쓰레기처럼 몸에 쌓아두지 않고 소각시키기 위한 운동을 게을리하고 당뇨에 걸리거나, 혈관질환에 걸리게 두는, 그래서 치매 뇌를 만드는/사회 흐름을 넓게 조망하기 위한 노력을 않고 대충 사는 인간들 누구에게나. (2016년의 화두는 페미니즘이라지. 요즘 트위터를 보다가도 요 비슷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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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할 즈음에는 과거의 뒤틀린 영광에 집착하는(하지만 그를 향유하지는 못하는) 치매걸린 노인과 젊은 딸이 나오기에 무언가 은유가 섞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를 훼손한 그른 시대를 유지하기 위한 부산물 같은 정책으로 뒤틀린 경제적 영광을 맞이했던 노인세대. 누군가에게서 강탈해 온 딸을 위한다지만 결국 딸을-실은 딸도 아니었던 선량한 젊은 부양인(선택권 없이 그들의 자식이자 손주 세대가 된 젊은이들)을 (딸 같아서 그러는거야-하는 중노년층의 무례하고 막된 행동을 캐릭터 관계로 투영한 건가?) 과거의 영광을 불렀던 방식대로 구해내려다 자기 손으로 죽여버리고 마는. 그러곤 자기가 그런지도 끝끝내 모르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상황을 보는 시각부터 잘못되었던. 심지어는 수시로 오락가락하는 신념을 지닌 중노년 세대.
이런 세태 비판적인 무언가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내가 너무 멀리 간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슥슥 잘 읽히는 책이었다. 간만에 독서하니 재밌었다. 드라마도 영화도 게임도 만화도 좋지만. 제대로 몰입하면 독서만큼 재미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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