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집어들면서 영화버전 케니 역인 니콜라스 홀트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실은 그 호기심이 크게 작용했던 것도 같다. 그다지 기대하며 집어든 책도 아니었지만, 읽어가면서 뒷표지에 실린 줄거리를 읽어버린 것을 꽤 후회했다.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읽어나가는 것이, 더 자세한 내막들을 기대하며 읽어나가는 것보다 훨씬 좋았을텐데. 그런 기대가 몰입을 좀 방해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문체부터 즐기며 읽은 책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진지하고. 소소한 면들까지 솔직하고 섬세하게 감지할 줄 아는. 사려깊은 마음, 억지스럽지 않은 낙관이 여기저기 세심하게 묻어있었고-그런 점들이 귀엽게 느껴져서 좋았네...-__-ㅋ(그래봤자 번역체잖아? 하는 얘기를..;)

마지막은. 
작가가 건네고 싶은 말을 마치고, 더 이상 전개를 늘려보았자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머니에서 스르륵 흘러나와서는 무척이나 생생하게 움직이다가 도로 스륵 되돌아간 것 같은. 조금은, 들여다보다 밖으로 밀려난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이런 결말도 나쁘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퀴어로서의 삶을, 조지의 눈을 통해 나름 상세히 볼 수 있었다. 충분히 암울할 수 있고-그런 우울이 아주 드러나있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상황들을 통찰하면서 고스란히 경험으로 받아들이고..기운을 내고..일탈도 꿈꾸고..가능성을 열어두려하고..마냥 고통의 감각에만 예민하게 집중하지 않고 우울의 구렁텅이에 온종일 허우적대지 않는 중년의 조지는 읽는 내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니, 실상은 조지를 통해 본 작가가 그랬지. 
귀여운 작가할부지. 이름을 기억해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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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page조지는 마음을 편안히 먹고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친구 집에 숨을 헐떡이며 도착하면 부끄러울밖에.) 이렇게 집 밖으로 나 있는 계단이 이 동네의 특징이다. 예전에 칠해진 문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계단도 있다. 이곳에 살던 보헤미안들은 손님이 술에 취해서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계단을 올라갈 경우에 대비해서 경고의 문구를 계단에 적었던 것이다. '위로 전진!' '약해지면 안 돼.' '몸이 형편없군. 운동해.'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이곳이 천국일 리 없잖아!'

란이거 보고 소리내서 낄낄 웃었다. 와..좋은데.

좋았던 글귀를 일일이 따오자면 끝이 없겠다; 지나치게 감상적이 된 듯; 앞부분도 이보단 훨씬 많았지만-뒷부분은 이런 식이면 죄다 옮겨 쓸 것 같아서. 여기서 끝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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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page두 사람은 말이 없다. 친밀하게 씩 웃고 있을 뿐이다. 조지는 이 이중적인 대화가 서로를 더 가까이 이해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그 '이해 못함'과 서로 엇갈린 목적인 그 자체만으로도 친밀함으로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케니는 연필깎이 값을 치른 뒤, 친구에게 하듯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한다.
"또 뵈어요."
케니가 서점을 나간다. 조지는 케니를 뒤쫓는 듯이 보이지 않으려고 잠시 서점에서 서성거린다.

란케니와 조지의 관계는 미묘한 부분을 드러내기도 하고, 일그러지기도 하면서 조지의 이런저런 정체성-중년기, 교육자로서, 성적 정체성에 이르기까지..??-을 다시 환기시키고, 조지로 하여금 그의 삶을 다시 긍정하게 만드는 자극이 되기도 하는데. 작가가 둘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은 끝까지 억지스럽지도 않고 무리도 없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뭔 말을 하는건지;) 고치기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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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page조지는 이 젊은이들의 아름다움에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두 젊은이는 절대 모르겠지만, 이들 덕분에 조지는 지금 이 순간을 경이롭게 느낄 수 있고, 인생을 덜 미워하게 되고...

란안구정화를 맛보는 조지. 
세상은 넓고 예쁜 사람들은 많고. 닥저 스킬을 발휘할 때가 떠올라 어쩐지 동감.. 
조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하며 속을 끓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기뻐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하긴. 오랜 시간과 경험이 준 강함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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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page'안 돼.'
(이 시점에서 조지의 눈썹은 평소에 아픈 경련을 일으킬 때보다 심하게 찌푸려진다. 입술은 칼날보다 가늘어진다.)
안 돼. '재미'라는 말을 쓰면 안 돼. 이 사람들은 재미있지 않아. 이 사람들을 절대로 재미와 결부시키면 안 돼. 그런 사람들을 다룰 방법은 한 가지뿐이야. 잔인한 폭력.
그러므로 체계적인 테러를 일으켜야 해. 효과를 높이려면, 고도로 훈련된 자객과 고문 담당자가 적어도 오백 명은 필요해. 모두 헌신적인 사람이어야 해. 테러 조직의 우두머리는 확실하고 단순한 목표, 가령 그 아파트 건물을 제거하거나, 그 신문사를 압박하거나, 그 상원의원을 은퇴시키는 것 등의 목표를 세워야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사상자가 몇 명이나 생기든, 순서대로 목표를 수행해야지. 테러마다 가장 중요한 표적은 맨 처음에 정중한 편지를 받게 되겠지. '조지 아저씨'라고 서명이 되어 있고, 살아남으려면 마감 시간까지 꼭 해야 하는 일을 정확히 적은 편지. 그 편지에는 조지 아저씨가 죄를 처단하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 설명도 적어야지.
...
그러나 조지 아저씨는 정말 그것을 바랄까? 사람들이 모두 쓰레기일 뿐이고 그 대부분이 죽는 것이 낫다고 해도, 처형을 계속하는 것 역시 하나의 도전인데, 조지 아저씨는 그런 도전을 좋아할 수 있을까? 조지가 마지막으로 내린 분석. 그 모두가 짐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 사람들은 짐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그 사람들의 말, 그 사람들의 생각, 그 사람들의 생활양식, 그 모두가 짐을 죽게 했다. 그러나 조지가 이런 생각에 깊이 빠져 있어도, 짐은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다. 짐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미국 인구의 4분의 3을 증오할 변명거리일 뿐이다.
...
그러나 조지가 정말 그 사람들 모두를 증오할까? 그 사람들은 그저 증오에 대한 변명거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조지의 증오는 무엇일까? 그저 자극제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조지에게는 아주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분노, 적개심, 원한. 이런 것들이 중년에게는 활력소가 된다. 바로 이 순간, 조지가 미쳤다고 말한다면, 조지 주변의 수많은 자동차들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 최소한 여섯 명은 조지와 마찬가지로 미친 상태일 것이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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