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뻬쩨르부르그 이야기"에 수록된 단편들은 예상과 달리 '비이'와는 전혀 다른 소설들이었다. 책 뒤편에 소개된 작가의 생애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야 고골의 작품들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는 걸 알았다. 
첫 시집이 실패하고 갖은 고생 끝에, 우끄라이나의 어린시절 들은 민담들을 토대로 쓴 "지깐까 근처 마을의 야화"가 성공을 거두면서 속편격인 소설들을 썼는데, 환상적 낭만주의 느낌이 나는 소설들이 나온 이 때를 우끄라이나 산문 시대라고 부른댄다. ('비이'는 "지깐까 근처 마을의 야화"의 속편인 "미르고로드"에 수록된 4편의 소설 중 하나다.)
이후 1835년 이후로 고골은 러시아 민중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소재들을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해냈는데, 이런 소설을 쓰던 때를 낭만적 사실주의 시대라고 한대나. 이 책에 실린 코, 외투, 광인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 가 그 시기의 소설들이라고.(고골 이전만 해도 황제나 귀족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들이 있었지, 민중을 대상으로 한 소설은 이 시기가 거의 처음이랜다.) 

'비이'같은 환상동화를 기대하고 빌렸고, 예상이 엇나갔지만 나름 이쪽도 나쁘지 않았다. 실린 작품들 전반적으로다가 당시 서민들의 찢어지게 가난한 삶과 퍽퍽하고 우스꽝스러운 관료, 계급주의에 대한 조소, 예술의 신성함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이 일관되게 그려져 있다고 느꼈음..

고골은 1809년 생이다. 네이놈 백과사전을 뒤지자면 18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났고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진격해오면서 그 혁명 정신이 러시아에도 이래저래 영향을 주던 시기였다니 그가 1852년에 죽기 전까지 그의 작품 안에는 그런 시대상이 반영되었다고 봐야겠다. (+당시 러시아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극히 보수적인 전제군주제와 경직된 관료주의 체제가 횡행하고 있었고, 유럽권 통틀어 농노제가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기도 했다. 위로부터의 정책으로 산업은 발달해갔지만 서민들의 삶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고, 크고 작은 폭동이 끊이질 않던 시기였다. 교육.문화.언론에 대한 통제가 극심했지만 유럽으로부터 낭만주의와 사회주의사상이 유입되었고 나폴레옹 전쟁 후 시민의식도 성장, 사상계가 유래없는 활기를 띄던 시기였다고.)

-----(끄적끄적 주저리주저리. 스포일러..)
<코.>
계급에 죽고 못사는 관료놈들, 저 오만한 코를 베어주갔어. 꼴이 어드러한지 보디. 그래봤자 나도 알지-니들이 변하갔어? 이런 느낌의 소설이었뜸.
<외투.>
고골은 한때 관리가 되겠다고 내무부에서 잠깐 일했던 경험이 있는데, 엄청난 박봉이었던지라 3개월만에 옮겼다는 얘기가 있다. 그때의 경험담 같은 소설인 듯. 계급을 무지 중시하는 가운데서도 계급 피라미드를 떠받치고 있는 하급관리의 삶 역시 당시 서민들처럼 궁핍하긴 마찬가지였던 모양.
<광인일기.>
각박한 계급주의적 현실에 고민하다가 아예 현실을 외면해버리는 주인공 이야기. 안타까운지고. 하지만 요즘 나오는 8시 반 드라마들에서도 경제적 신분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사랑 얘기가 즐비하다네..

>여기까지는 읽는 게 좀 힘들었다. 시린 손 호호 불며 잠에 취한 충혈된 눈으로 감기걸려 지끈거리는 머리를 벽에 박아가며 쓴 글 같다고 생각했다. 당장 먹을 빵 구하려고 단어 수 눈대중해가며 꾸역꾸역 쓰고서는 동 트자마자 출판사에 던지고 돈으로 바꿔왔을 듯한. (근거라고는 전혀 없음.) 푹 빠져 읽기엔 전개들이 산만하고, 소개에선 유머러스하다는데 그것보다는 조소가 많은 것 같고..하나같이 좀 악에 받친 듯한 느낌. 괴로웠어..
<초상화.>
>이 책에서 제일 몰입도가 큰 소설이었음. 마음에 든다.
신으로부터 오는 신성함의 투영인 예술작품과,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가난하고 심지 굳건한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동경. 긍지와 궁핍이 버무려진 고달픈 작품활동.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서민들의 몇 푼 안되는 돈을 우려먹는 냉혹한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한 혐오가 담겨있는 듯. 이야기 자체로만 봐도 꽤 스릴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있는데, 1부에서는 가난하고 재능있는 젊은 화가가 기묘하고 섬뜩한 어느 노인의 미완성 초상화를 산 뒤 경제적으로 흥하는 유명화가가 되지만-추구하던 고매한 정신세계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종내 살벌하게 타락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2부에서는 초상화에 얽힌 뒷 이야기가 밝혀진다. 1부에서 젊은 화가가 초상화를 산 뒤 꾸는 꿈에 대한 묘사와, 동료 화가의 그림을 보고 그때까지의 허울뿐인 삶에 회의를 느끼며 좌절하곤 무서운 기세로 타락해가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정말 대단했다. 2부에서는 1부의 화가와는 대조적인 신앙적으로-예술적으로 경지에 오른 화가의 모습이 묘사되는데, 알흠답고 가치있어 보인다는 데 동감하지만 한편으론 훗날 발현할 고골의 심리적 위험요소가 여기서 언뜻 보이는 것 같다. 고골 역시 "죽은 혼"을 집필한 후로 후속편에서 주인공의 구원을 그리려다 실패하고는 신이 자신에게서 구원적 면모를 거두어간 거라며 뚜렷하게 광신적으로 변해갔다고 하니. 딱 '초상화'에 등장하는 화가들이 매달렸던 것이나 그의 생이나 다름이 없지 않나..
<네프스끼 거리.>
시간별로 다른 양상을 띄는 네프스끼 거리의 하루. 
서로 다른 두 여인의 뒤를 좇는 두 사내가 겪는 이야기. 
화가 삐스까료프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내려받은 듯한 여성을 보고 홀린 듯 그 뒤를 좇지만-그녀는 나태와 천박과 돈에 집착하는 마음이 뿌리깊게 박힌 창녀다. 그는 그녀의 고결한 미모와-그와 완벽히 반하는 그녀의 실제 모습 사이에서 갈등한다.
막 5급 중위로 진급한 그의 친구, 중류계급의 일원인 삐로고프는 그와 대조적이다. 
교양이 풍부하고 능글능글 유머러스한데다 뻔뻔함까지 갖춘 이 작자는 좇아 간 여인이 유부녀인 것엔 아랑곳도 않는다. 끊임없이 뻔뻔하게 수작을 하다 여인의 저항소리에 뛰어온 남편과 그 동료들에게서 아주 거친 경험을 한다. 하지만 관료를 상대로 거친 짓을 했다며 때린 쪽은 안절부절하는 반면, 애초에 불씨를 제공한 당사자는 계급을 이용한 복수를 하겠다고 벼른다.
고골은 양 쪽의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네프스끼 거리를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람들을 우롱하는 운명, 그리고 겉모습만으로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허위와 기만이 넘치는 거리라고./ 거리를 지나는 번지르르한 사람들의 이면에 숨은 계급과 빈부의 격차. 매력적인 외관만큼 비싼 돈을 요구하는 상품들.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생활동안 그의 마음에 있던 이야기일듯 싶다. 화려하고 쾌적해보이기만하는 아름다운 도시 중심부의 냉랭한 이면. 고결한 미모의 여신님도 계급과 돈이 따르지 않는 한 어울리는 고결한 삶을 살아갈 수 없고-억울한 사연도 돈과 계급 간의 이해관계에 얽히면 그저 숨죽여 끌어안을 밖에 도리가 없는...이라고 생각했지만 잘못 짚었음. "오월의 밤" 해설에서 보니, 고골은 평생 실제 여성과의 연애나 결혼을 꺼렸다고 한다. 결혼 자체에 대해서도 공포스러워해서 여동생들의 결혼을 이유없이 막기도 했다고. 이 단편에서도 여신적인 면으로 추앙되거나-멍청하거나 혐오스런 죄악의 근원, 같이 비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걸 보면 고골의 여성관이 얼핏 보이는 듯. 거세공포증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족으로..이 단편, 아무리 외모가 맘에 들었다손 쳐도, 애초에 왜 몰래 따라가냐..싶은 내용이기도 하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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