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 정희진.
[남성성, 식민지 남성성]
여성학 강의를 드는 것은 대체로 여성들이다. 남성들이 듣고 변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실상 여성학 강의를 듣고 변하는 남성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인종, 계급, 젠더는 권력관계이기 때문. 계급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 자본가를 교육하는 방법을 유효하게 써먹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러한 변화는 제도나 물리력을 통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젠더 권력도 마찬가지.
젠더권력이 오래되고 치열한, 정치의 최종심급이라는 사실을 전체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여성주의와 소통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젠더를 끊임없이 탈정치화하려는 사회시스템이 워낙 강력하여 제도적, 물리적 제재가 약했으며, 더욱이 남성의 변화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으로 가능할 것인양 여성들이 남녀관계에서 더 노동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젠더권력에 대해 알아보고,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남성성은 젠더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고, 어떤 문제도 남성성을 위시한 젠더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우선 남성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희진은 서구에서 남성성을 규정한 여러 여성주의 이론을 살펴보고, 서구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띄는 한국남성의 '종속적(주변적)남성성', '식민지 남성성'을 규명하고자 했다.
[남성성에 대한 여성주의이론]
서구 여성주의에서 이루어진 남성성 연구는 크게 4갈래로 나뉜다.
1. 근대 자유주의
- 신분제 사회 붕괴 이후.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과학이나 국가 앞에 평등하다는 근대 자유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여성도 인간이다.' '남성은 인간을 대표하지 않는다.' 고 주장했다. 이는 '성별'과 '인간' 개념 사이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인간은 인간 이전에 남성과 여성이어야 한다는 성 차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적 영역에서 남녀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논리는 남성을 구원했고 혁명을 중단하게 만들었다. 결국 '(공적 영역에서) 여성이 남성의 기준에 맞는 시민이 되는 것'을 지향함으로써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부터 근본적인 비판을 받는다.
2. 실존주의
- 시몬 드 보부아르, 1949년 '제2의 성'. 뛰어난 지식인임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소외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추적함. '인간'이란 실상 '백인 남성' 이며, 중산층 백인 남성이 아닌 여성, 흑인은 인간이 아닌 '타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규명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실존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애초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제1의 성-진정한 인간-으로 길러지는 남성과, 제2의 성-남성의 소유, 부속, 기호-으로서 길러지는 여성을 조명함으로써 남성성이 생래적이지 않음을 지적했다.
3.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
-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며 성장. 이들이 가진 근본적 문제의식은, 기존 여성주의가 젠더를 공적 영역에만 한정해서 다룬다는 것이었다. 여성이 받는 교육, 경제력 등의 공적 지위는 이성애에 기반을 둔 가족제도 하에서의 노동,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 등 사적 영역의 지위와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되려 반비례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었다. 여성억압은 사적영역에서 더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가정 안의 불평등과 섹슈얼리티 억압이 주요 정치적 의제로 상정되지 않는 한,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높아서 낮으면 낮아서 차별 받는다. 이들은 사적 영역을 정치화하고, 좌파 남성들의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비판하며(마르크스주의 비판) 여성 자체가 억압받는 계층이라고 보았다.
여성폭력, 여성살해, 군 위안부 문제 등 전쟁성폭력, 몸 이론, 포르노그라피, 성적 대상화 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의 통찰은 현재 한국사회 진보 진영의 멈추지 않는 성폭력, 성차별과 정확히 일치한다.
4. 주디스 버틀러의 행위성 이론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딜레마에 탈출구 제시. 남성과 여성은 존재가 아니라 반복적 수행을 거쳐 구성되는 사회적 규범이자 임의적 범주라고 제시. 애초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실체는 없다. 행위가 있을 뿐. 때문에 주디스 버틀러는 '언어적 실천'이라는 패러다임을 확고하게 제시함.
==남성은 인류, 인간성, 국가를 대표함. 남성성은 남성이 정해왔음. 그러나 바람직한 여성성은 남성사회가 정해주는 것. 때문에 남성은 개개인으로 식별되어 온 반면, 여성은 타자화되고 집단으로 뭉뚱그려져 왔음. 젠더 이분법은 남성성을 그 기준으로 하므로, 그 자체가 차별임. 그러나 마치 남성 집단과 여성 집단이 각각 균질적이고 독자적인 대립항인 것처럼 선전됨.
남성성, 여성성은 동일하고 고정된 개념이 아님. 성별불문 실현은 불가능함.
[패권적 남성성]
서구에서 한 시대의 대세가 되어 온 남성성. 시대별로 권력과 부를 획득한 주류 남성들이 영위한 남성성. 대략 시대적 흐름에 따라 네 가지 분류할 수 있겠는데, 이전 시대 것을 계승하고 확장한 것이라 완벽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움. 쨌든 이들을 복합적으로 융합한 것이 시대마다 새로운 남성성으로서 각광받아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임.
1. 그리스의 시민/전사 모델.
-군사주의+이성주의. 남성다움=시민권. 영예로운 남성 전사의 이상이 국가의 행위에 투영된 것.
2. 가부장적 유대 기독교 모델.
-책임감, 소유권, 아버지로서의 권위 등 가정 내에서의 이상 강조.
3. 영주/후원자 모델
-귀족적 이상, 군사적 영웅주의, 높은 위험(결투 등) 감수.
4. 프로테스탄트 부루주아 이성주의 모델.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성과 가장 가까움. 경쟁정 개인주의, 이성, 자기 통제, 극기와 자제력, 공적 생활에서 몸에 밴 책임감 강한 생계 부양자.
==시대마다 이러한 모델들을 재구성하고 재결합하여 남성성의 변화나 대체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남성 권력의 쇠퇴나 변질은 아니었다. '남성의 위기' 담론은 다양한 남성성 중 하나가 다른 남성성으로 교체될 때 나타나는 남성 문화의 반응으로, 젠더 이분법적인 상황에서는 이를 '여성 지위 향상'으로 이해하려 든다.
[주변적 남성성]
돈과 권력을 획득하지 못한 비주류 남성들이 갖는 남성성. 가난한 남성, 동성애자 남성, 장애인, 학력이 낮은 남성, 병역의무를 마치지 못한 남성들은 지배적 남성성의 위계 아래 있음. 여성의 일상생활에서는 패권적 남성성보다 주변적 남성성을 경험하게 될 때가 많다.
남성 문화 안에서는 중심을 지향하거나 비굴하고 의존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여성에게는 더 폭력적이고 강한 남성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남성성을 확장하고자 하지,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려 들지 않는다.
지배적 남성성의 자원이 사법권력, 지식, 자본 등 일반적인 권력이라면, 이들의 남성성은 폭력, 협박, 치킨게임, 낭만화된 하위문화-조폭영화 등, 여성의 모성과 연민을 자극하는 자작극 등을 자원으로 삼는다. 폴 윌리스의 백인 남성 노동자 계급 연구 등에서 볼 때, 이들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등의 분노로 승화하기 보다 당장의 남성성 획득을 위해 미래를 포기하며, 이주민과 여성 노동자를 향한 배타성, 우월 의식으로 열등감을 보상받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결국 사회의 보수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일본의 NEET족의 탈력문화, 영국 백인노동자의 루저문화 등에서 볼 때 이들은 자발적 루저로서 노동을 비롯한 공부, 연애, 관계맺기 등 조금이라도 힘이 들어가는 일은 하지 않는다. 강하지만 강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며, 피해자 코스프레에 능하다.
비주류 남성들의 괴로운 일상의 원인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에게 있으나, 이들은 여성들에게 문제를 전가한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남성 연대를 활용한다. 남성에겐 집단의 성원으로서, 모든 차이를 초월한 남성 연대라는 가장 강력한 힘의 역사가 있다. 이성애가 남성 연대를 이길 수 있다면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남성 가장들은 아내의 월급보다 남성 동료의 월급이 많기를 바라며, 성폭력 피해자가 자기 가족이라 할지라도 숨기거나, 가해자 편에 서거나, 피해자를 대신하여 합의금을 챙긴다. 남성은 상황에 따라 자신을 개인 혹은 남성 집단의 성원으로 정체화한다.
남성은 정체성이 아닌 포지션이며, 모든 남성은 직접적인 성 차별의 수혜자이자, 잠재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 개개인의 품성, 가치관, 성찰과 무관하게.
[식민지 남성성]
제국주의 시절, 침략자들이었던 서구에서의 남성들이 독립성, 자율성과 주권, 군사주의 등을 특징으로 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압박했으며 이는 서구 페미니즘의 비판을 받았다.
반면, 식민지배를 겪었던 한국 남성들은 자국의 여성을 지키기 보다 자원으로 여기고 소모하고, 강대국이나 윗 서열 남성들에게 조공하며(미군 성범죄에 대해 미국여인을 범하자는 감정적 논리가 우세했던 사례, 군 위안부, 기생관광, 미군기지촌 성매매 합법화 사례 등을 들고 있음. 최근의 YG연예기획사 등의 사례를 봐도, 알게 모르게 흔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듯.), 한편으로는 강대국들 내지는 높은 서열의 남성들과 부대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여성의 위로와 지지를 끊임없이 갈구한다. 식민지 남성성을 규정하는 특징 10가지를 보자..
1) 보편적 주체로서 자신을 국가, 민족과 동일시
2) 성별 정체성을 국내 여성과의 관계에서 구성하기보다 외세와의 관계에서 파악
3) 강대국에게 저항하거나 이용하여야 하는 남성의 중대한 업무 앞에서 여성들이 자신과 뜻을 함께 하지 않고 평등을 외치는 것을 반민족적으로 여김
4) 여성 해방은 경제적 계급 해방이나 민족 해방 이후의 과제임
5) 여성은 강자와의 투쟁에 바쁜 자신을 대리해 생계를 책임지고, 자녀를 양육하고, 성적욕구를 해결해 주는 성역할에 충실해야 함
6) 자신이 지치면 여성은 위로와 지지와 격려를 해주어야 함
7) 자원이 부족할 경우 적의 성적노리개가 되어 먹을 것을 얻어와야 함. 이 경우 식민지 남성은 우울해하거나(이상-날개), 자존심이 상해 여자를 패거나 혐오하고, 환황녀라며 매도해 공동체에서 몰아내고(안정효-은마는 오지 않는다), 중산층 여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피해여성을 진정한 민중으로 숭배하거나(김기덕-해안선), 분노로 스스로 미침(남정현-분지)
9) 좌파 민족주의 진영은 가해국과의 투쟁에서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보다 경제적 협력이나 군사원조를 받아내는 등, 협상 자원으로 활용해 왔다.
10) 자신이 이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은 성찰이나 강자에 대한 저항이겠으나, '도리가 없'으므로 술을 마신다. 무기력, 자기연민, 고뇌하는 자기도취상태에 있다.
역사적인 흐름에서 본 식민지 남성성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양상을 띄며, 이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약소국 남성성과도 다른 특이한 양상이다.
페미니즘은 성별 분업의 철폐를 주장하지만, 한국 남성은 성별에 따른 분업조차 하지 않는다. 여성과 직면하는 남성이 없으며 없음을 이야기하며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필요한 생존전략이 무엇일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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