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5.02.03 세상의 마지막 밤. 1
세상의 마지막 밤. 읽은 지 며칠 지났다. 모 게시판에서 누군가 올린 발췌글을 보고 읽기 시작했는데. 신곡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고. 오르페우스 설화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고.
프랑스 극작가이자 소설가 로랑고데의 소설이다. 이 냥반이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차용한 소재를 소설로 풀어내는 작업을 많이 한다고. 연극으로 십대들이 선택한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는데(상 타이틀을 보고 프랑스는 노소 안가리고 연극들을 대중적으로 참 많이 즐기나보다 싶었음.) 그만큼 실제 사람의 일상을 그려냈다기보다 어느정도 절제된 극, 현대무용의 몸놀림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장면장면이 많다.
아들을 잃은 줄리아나의 방황, 저주 장면 같은 것들에서 그런 걸 많이 느꼈더랬음. 연기자가 무대 위에서 격하지만 절제된, 처절한 몸동작으로 바르르 심장을 토하듯 연기하는 것을 보는 듯한.

애끓는 슬픔이 고요하게. 때론 처절함을 담고. 때론 음산하게.
지저분하고 차가운, 아름답고 어두운 도시의 거리를 이리저리 뒹굴어다닌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여인의 도려낸 가슴이 바람부는 자갈언덕에 피흘리며 내던져져 있다.

좌절된 이상. 알아주지 않는 연구. 모멸로 범벅된 육체. 퇴락한 믿음과 냉소. 그것들이 지옥문을 열고. 그럼에도 애끓는 사랑과 삶을 향한 애착이 다시 생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낸다.

진정한 죽음은 기억에서 잊혀지는 '무'.

-----
오르페우스 신화는 무척 좋아하는 신화 중 하나다. 홀릴 듯 아름다운 음악과 미모를 지녀 바쿠스를 섬기는 물가의 여인들이 사모해 마지 않는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를 만나 사랑하지만. 뱀에게 물려 저승으로 끌려가버린 연인. 그녀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 리라를 들고 지옥을 걸어 케르베로스를 설득하고 하데스를 감명시키고는 그녀의 손을 잡는 데 성공하지만. 뒤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기곤 다시 연인을 잃고 만다. 가슴을 쥐어 뜯으며 다시 요청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거절 뿐. 홀로 돌아와 마냥 슬픔에 젖는다. 그리고는 사모와 기다림에 지쳐 난폭해진 여인들의 손에 찢겨 죽는다.

그 아름다운 천재성. 금기를 해제시키는 애절함. 어찌할 수 없이 수렁으로만 빠져드는 상실감. 되돌릴 수 없어 가슴을 뜯는 회한. 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난폭한 애증. 처참한 잔해로 사라지는 고귀한 목숨..매혹적이다.
-----

마테오와 줄리아나는 피포라는 아이가 있다. 택시기사와 호텔리어의 5살난 아이. 일상에 지친 아버지는 어린이집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려다주는 데 실패한다. 무섭게 아이를 잡아끌며 허겁지겁 어린이집으로 걸어가는 와중에 총격전이 벌어진다. 마피아들의 세력다툼이었다. 아이를 급히 끌어안고 몸을 낮추며 소란을 피했으나. 다시 일어나보니 아이는 미동도 않는다. 아이는 죽었다.

호텔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오열한다. 하루하루 별일 없다는 듯 견딘다. 아버지는 매일 손님없는 택시를 타고 밤거리를 방황한다.

줄리아나는 끝내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이를 죽음에서 데려오든지, 총질을 해댄 범인을 죽여오라고 남편에게 요구하기에 이른다. 마테오는 총을 들고 거리에서 그를 저격하려 하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

줄리아나는 마테오를 떠난다. 그녀는 악착같이 일에 매달리는 한편. 수십일 간 기적을 베풀던 성인의 제자가 있다는 성당으로 간다. 아들의 부활을 기원하는 쪽지를 성당 벽 틈바구니에 밀어넣고는, 이만한 기원이면 전해졌을테고 아들을 다시 되찾을 수 있으리란 확신 하에 신부에게 부활을 탄원하지만. 신성모독을 범하려 말라는 독한 질타를 받을 뿐이다. 그녀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도시를 떠나.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황폐한 시골구석으로 되돌아가 여생을 맞으려한다. 그리고 사랑도. 결혼도. 아들의 존재조차도 두 번 다시 되돌이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떠나온 이에 떠나온 곳에 저주를 걸었다.

마테오는 택시를 타고 방황하다 여장남자 창부 그레이스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가 다니는 성당 광장 근처의 기묘한 카페에 들르게 된다.
한때 급진적 좌파였던 주인 가리발도. 항구와 광장에서 몸을 파는 싸구려 창녀 그레이스. 고서를 탐구하지만 진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뒷골목을 기웃거리며 젊은이들에게 부러 얻어맞곤 하는 페도파일 '교수'. 세상의 부랑자와 천한 자들을 안쓰러워하지만 교황청으로부터 탄압을 받은지 오래이며, 신에 대한 믿음을 접어버린 냉소적인 늙은 신부. 아들을 잃은 마테오도 그 틈바귀에 끼어 카페에서의 묘한 회합이 형성되고. 이야기가 몇 번 도는 와중 교수는 지옥의 입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항구도시를 둘러싼 곳곳의 지옥입구. 유황이 피어오르는 휴화산과 새가 없는 호수. 항구의 오래된 탑. 곳곳에 지옥문은 퍼져있다. 그들은 결국 피포를 찾는 여정을 함께 하기로 한다. 몇몇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신부와 아버지는 죽은 아이를 되찾기 위해 직접 지옥문으로 들어선다.
-----
이후 펼쳐지는 것은 단테의 신곡을 방불케하는 지옥도다. 일흔이 넘은 신부는 지옥문 아래서 지쳐 숨을 거두고. 육체를 벗어난 유령이 되어 다시 일어선다. 그 앞에서 결코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거대한 지옥문이 열린다. 그리고 영혼은 이제 속속들이 안다는 듯 음울한 목소리로 아버지의 여정을 안내한다.

죽은자들이 쥐고 온 산자들의 피흘리는 일부를 곳곳에 뜯어 쥔 채로 살아 움직이는 빽빽한 가시덤불.
그 사이를 미친 듯 날아다니는 흡혈귀들.
갓 죽은 영혼들을 끌어들여, 그들이 품었던 모든 선함과 고귀하던 목적과 온기담긴 추억과 가치있던 행적들을 초라하게 퇴색시키고 추하게 뒤덮어 온통 회색의 허무만 남겨버리는 검은 강. 거기서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다 체념과 침묵으로 순응하는 영혼들. 조금이라도 더 생에 머물고 싶어 강을 빠져나가려는 집념어린, 혹은 갓 태어나 죽은 영혼들과-그들을 가차없이 강물로 쳐박아버리는 사자들. 종국에는 거대한 나선형으로 줄지어 돌고 돌아 중앙의 '무'로 사라져가는 영혼 무리.

음울한 신부의 영혼은 아버지에게 그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고는 아들에게 가는 방향으로 이끈다.

자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느끼곤 울며 기뻐하며 속도를 늦추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기에 가속하여 무로 빨려드는 나선. 그 혼령 무리 속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발견한다.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고는 되돌아보는 아이를 잡아 안기까지, 무수한 영혼들 틈바귀에서 허우적거리고. 아이를 몸 속에 품고 되돌아나오는 그 긴 여정 동안. 아버지는 서서히 죽음에 잠식되었다.
지옥문을 앞에 두고 더 이상 아이와 함께 걸어나갈 수 없었고. 닿은 무릎을 펴지 못한 채 주저앉아 아이를 문밖으로 전송하였다. 말할 기력도 없이 아이를 응시한 채 조용히 문 저편에 남았다.

되살아난 신부는 문을 두들기며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안고 기다리던 이들과 재회했다. 빼앗긴 영혼을 되찾으려는 지옥의 울부짖음이 도시를 마구잡이로 찢고 뒤척이는 밤. 그들은 달아났다.

줄리아나는 마테오의 죽음을 듣고 스스로를 저주하며 가슴을 도려내었다. 미쳐버린 그녀는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끔찍한 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렇게 이십여 년을 서로 보듬고 가르치고 나누며 함께 하였다. 그리고 청년이 커감에 따라 하나 둘 세상을 뜨거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되새기며 자라났다. 때가 되자 자신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갚았다.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다시 한 번 지옥 입구로 향한다.
그러나 우연찮게 만난 그레이스는 친어머니의 존재를 상기시켜준다.

자신을 부정하고 단절시켜버린 어머니. 아버지를 떠난 어머니. 때문에 그 역시 그녀를 부인하며 살아왔으나.
결국 청년은 오래 전 지진이 있던 날 밤, 이미 열지 못하게 망가져버린 지옥문을 여는 것을 포기한다. 그녀가 일하다 거꾸러져버린 병원을 찾고. 아직 젊은 나이에 아무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어머니가 있는 병실문을 연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버지가 지옥 건너편에서 기력이 다한 채 건네지 못했을 말을 입에 담고.
'약속을 이루었다'.
'당신의 요구는 수행되었다'.
'사랑한다'.

세 사람은 제각기 떨어져 흩어져가는 중이다. 그러나 그 순간 한자리에 모여 빛난다.
-----

단테의 신곡. 오르페우스.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
세월호 참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뒤의 미칠 듯한 상실감. 지옥에서 아이의 발을 끌어 당겨 오게 만드는 맹목. 스스로를 저주하고 세상에서 지워내고서야 나아질 듯한 불길. 광기.
지옥으로 가는 골목골목 피가 뚝뚝 돋은 채 가시덤불에 뜯겨 있던 산 자의 심장 살점.

아직도 진행형인 사건규명. 그들을 두번 죽여내는 뒤틀리고 비루먹은 시선들. 잊혀져가고 무덤덤해져 잃은 자들의 속내만 시커멓게 그을려대는 비극으로 끝나지만은 않길.






Posted by 에크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