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씨가 애증. 이란 단어를 썼던데. 어느 정도는 공감. 
어린 루퍼스가 등장하고. 주인공과 운명적으로 엮이고 휘말리게 되면서 초반에는 어느 정도 그가 보다 나은 인간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지만. 보통의 인간이 자신이 묶인 시대를 벗어나 더 내딛는 데는. 자신이 가진 뒤틀린 특혜(실은 근육펌핑효과를 내면서 내장지방도 비대하게 키우는 스테로이드에 가깝겠지만)를 깨닫고 벗어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모양이다. 보다 조화로운 미래를 경험한다해도. 그래도 되는. 젖어도 되는.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 폭력. 야만스러움. 거기서 벗어나기란.
거기 휘말리고 충격을 입고 넌더리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라 그래야 하나. 인간 자체에 대해 영영 무관심해질 수 없는 얽매임 같은 것을 읽었다. 
야생종과도 닮은 느낌인데. 필사적으로 애쓰면 뒤틀리고 일그러진 그 야만스러운 공동체. 가해자와 피해자들. 두통 뿐만 아니라 실제로 육체적으로도 치명상을 야기하는 모두에게서 떠나갈 수 있고 벗어날 수 있는데도 끝내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고 개입을 멈출 수 없어한다는 점에서. 애증이라고 하면 애증일까. 것보다는 좀 더 염세적이고 비관적이고 메말라 있지만 말이다. 그 세계가 소환된 과거. 아니면 초능력자의 무리로 특정지어져 있긴 해도. 결국 주인공이 스스로 그 일원이라고 여기기 때문인걸까. 

아무리 고독과 고립을 꿈꾼대도 사람들과는 어떤 식으로든 얽매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전해듣거나 볼 수밖에 없고. 어떤 식으로는 판단하고 평가하고 애착을 느끼며 관계를 갖게 되고. 그러다보면 결국 어떤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방관자이든. 우월한 위치에 있든. 세계를 둘러싼 혐오와 폭력으로부터 무관할 수 없다...영향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주인공들이 그토록 할 수 있는 선에서 애를 썼던 것도 그 사실을 무섭게 알고 있었기 때문. 

어떤 시스템에서든.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폭력이 존재한다면 모두에게 알게 모르게 폭력의 흔적이 남는다. 자유를 제한하고. 한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기능하는 것을 막고. 가능성을 꺾어버리는. 결국 모두가 피해를 입는 셈이다. 최근의 페미니즘 이슈든. 인종차별이슈든. 그런 것들을 보면서도 느끼는 것. 때문에 그런 화두에 동참하는 것은 어찌보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간만에 몰입해서 밤을 새며 읽었던 소설이었다. 야생종 이후 처음 번역되어 나오는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이라 해서 많이 기대했고. 나왔다는 소식이 보이자마자 주저 않고 두 권 다 질렀다.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글들이었고. 애착이 간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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