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에 SF소설가로 이름을 날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시니컬하고 이지적인 건조한 문체. 군대복무경험. 아프리카를 비롯한 각국에서의 풍부한 경험. 과학적 지식. 여성의 몸에 대한 욕망. 그의 소설을 읽은 많은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인 페미니즘 메시지에 열광했다고. 하지만 누구도 그가 남성의 가면을 쓴 여성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정체가 밝혀진 후, 70년대 SF문학계는 아직도 팁트리 쇼크라고 일컬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체체파리의 비법을 비롯해서 이 책에 실린 많은 단편들이 아포칼립스 삘이고, 디스토피아스럽다. 남성들의 성충동과 공격성을 이용해서 인류를 거세시켜버린 외계인들(체체파리의 비법). 의도치 않은 타임슬립으로 남성이 멸종한 미래세계와 조우한 우주비행사들(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 스스로 건실한 남성을 선택하여 임신하고는 남초세계의 중심에서 당당히 프로로서 살아가다가, 유리천장과 여성혐오에 질린 나머지 외계인과 접선하여 지구를 뜨는 모녀(보이지 않는 여자들). 외모지상주의 세계의 밑바닥에서 구르다 PPL을 위한 아바타와 연결되어 신세계를 접하는 소녀의 사랑(접속된 소녀). 과밀된 지구를 벗어나 인류가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돌던 와중, 어마어마한 사실에 직면하고는 괴멸되어 버리는 마지막 탐험대(덧없는 존재감). 우주와의 일체를 갈망하며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 둘 '강'으로 향하고 이제 몇 남지 않은 지구에서, 그 역시 외계의 지식과 평온함에 녹아들기 위해 강으로 향하던 와중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는 소녀와 만난 소년(비애곡). 숲에서 만난 신비한 여인을 살리기 위해 미쳐버린 천재 생물과학자(아인박사의 마지막 비행).

개중에는 초기 진입 허들이 좀 높은 단편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흥미롭게 읽었다. 지금보다 여권이 열악했을 70년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나무랄 것 없는 교육을 받고. 뛰어난 두뇌로 CIA나 전투기 조종사, 군 정보원, 실험 심리학 박사 등으로 일하면서 그가 남초에서 겪었을 갑갑함, 좌절, 회의 같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느낌. 실제로 업무 중에 받은 스트레스를 글을 쓰는 것으로 해소했다고. 

'죽어라! 이 희망없는 개떡같은 인류!'
'걍 여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너희만 남지 그래?'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여자들만 남아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어떻게 굴러갈까?'
'이 외모지상주의가 과학기술과 접합하면 어디까지 천박해질 수 있는지 보자'

같은..속내가 들리는 듯도. 다만. 개인적인 분풀이로 치부하기에는 글 안에 녹아들어간 메시지나 아이디어들이 신랄한만큼 미래를 꿰뚫는 통찰력이 있고 탁월하다는 느낌. 그 점을 인정하듯, 당시 네뷸러, 휴고 수상작이나 노미네이트 된 작품들이 대거 있다.
이런 남자가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많은 70년대 여자들이 위안을 받았을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소외되는 소수자의 입장에 서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듯.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에 나오는 루퍼스도. 더 나은 세계에 대해 보여주고, 끊임없이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던 미래인을 곁에 두고서도 새로운 지식을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비틀려고만 하지 정말로 노예들의 인권에 대해 눈을 뜨진 못했더랬고. 당장 요즘 페미니즘 이슈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봐도..

남성들의 공감능력은 태생적으로 그 평균이 여자들에 비해 낮다고 하는데, 공감능력이 충분히 길러질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서천석 샘의 우리아이 괜찮아요 라됴에서 그러더라)...우리 사회가 남성들에게 그닥 공감능력을 발달시킬 기회를 주지 않는 것 같음. 소설이나 영화가 공감능력을 키우기에 좋은 도구라고 하지만, 요즘 영화에 여자배우가 얼마나 나오나? 소수자가 얼마나 주인공이 되나? 한국소설 여험 어떤가? 드라마에서 강간 소재를 얼마나 자주 써먹나? 멋진 남자들이 한다는 터프한 행동들은 또 어떤가? 생각해보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굳이 공감 안 해도 아직은 잘 살아갈만한 세상이다. 견디다 못한 한 쪽이 요즘 공감결여자들과 연애와 결혼에 보이콧을 하니 좀 시끄러워질 뿐. 그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다.

가면을 쓴 시절, 편지로만 소통했다고 하는데, 가장 친밀했던 작가가 어슐러 르 귄이었다고. 르 귄 여사 역시 '어둠의 왼손' 같이 성에 대한 사고실험을 여럿 했던 작가기도 해서 어느 정도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던가 싶다. 가면을 벗고 나서 나눴다는 글, 르 귄의 소회를 보면 씁쓸하기도 하고. 훈훈하기도 하고.

가면을 벗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르 귄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글을 이해해주지는 못하지만 부인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좋아해주고 이해해주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고 썼다고 한다.
그러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아니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의 남편은 알츠하이머로 오래 고생했고. 앨리스는 오랜기간 소설에서 멀어져 남편을 간호했다고. 남편이 시력을 상실하게 되자 좌절하게 된 그녀는 산탄총으로 남편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었다 한다. 아들은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바로 죽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으로 여겼다'고 회상했다는데. 
작가 이력과 소설에서 읽히는 그녀의 삶. 당시의 여권. 희귀하게도 그녀를 존중해주는 남편. 그 사랑과 절망. 

이 책의 속지부터 소설과 해설까지를 주욱 읽어 나가는 것은 뭔가..참 복잡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경험이었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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