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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2.14 트라이브. 2

트라이브.

영상 2015. 2. 14. 00:08
원래는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서울도서관에 반납할 책이 있었음. 걍 내려가는 걸 내일로 미루고 다녀오는 길에 트라이브 상영관을 찾았다. 마침 씨네코드 선재에서 하는 게 있길래 찾아갔다. 도중에 좀 우왕좌왕. 그래도 여차저차 어떻게든 찾아갔다.
수화로만 이루어진 영화라기에 호기심이 컸다. 음악도 하나 나오지 않는,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사용하지 않는, 평행세계의 동떨어진 종족 이야기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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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새로운 기술학교에 전학한 철부지 소년이 학교 내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갱 활동에 몸담게 되고,와중에 첫 섹스와 애착을 경험한다. 갱단 아래서 섹스를 팔아 돈을 버는 소녀에 대한 소유욕에 불타오르지만, 갱에서는 그녀를 꾀어 이탈리아로 보낼 생각이고, 소녀는 그를 그저 돈 대오는 호구 정도로 봐 줄 뿐. 뒤늦게 소녀가 떠날 거란 걸 알고는 막으려 하지만, 갱에서는 그를 처참하게 후드려 패고 좌절시킨다. 이후 소년은 갱단에 대해 막나가는 복수를 한다.

그 일련의 모든 과정은 오로지 화면만 보며 유추해 가는 수밖에 없어서, 소소한 부분은 틀렸을지 몰라도. 얼추 저런 내용인 건 맞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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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상황은 잘 모르고, 사람들이 청력을 모두 상실한 듯한 세계이기에 현실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도 모르지만,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일련의 과정은 훅 하고 날것의 느낌이 난다. 소리는 작거나 없지만 온갖 표정과 몸짓들이. 당연하다는 듯 절망과 폭력에 찌든 험악한 일상과 기복어린 감정들을 파닥파닥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 표현해낸다.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 소소한 기술을 배우며 학교를 다니지만 그것들은 그들에게 전혀 희망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 같다. 소녀들은 그저 화물트럭운전수들에게 피임도 않고 몸을 팔며 돈을 모으고, 갱단소년들은 도둑질하고, 삥 뜯고, 뒤치기하고, 소녀들을 이용한다. 어른들 역시 그들의 사업에 수저를 얹는다. 더러운 현실에 순응하고 더러운 놈이 되거나. 더러운 놈들 틈바구니에서 적당히 이용당해주면서 돈을 벌어선 타국으로 떠나거나. 그들은 그 정도 선택지 밖에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랑놀음은 그래서 적절치 않다.

소소한 일상의 작은 소리들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흐르는 가운데, 몸짓들만이 점점 파들거리며 격렬해져가고, 그러자 가끔 가쁜 숨소리에 고통섞인 울음이 뒤섞이고, 그것들은 머리통이 깨져나가는 처참한 소음으로 확대되고서야 조용히 잦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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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아주 기묘했다. 아무도 옆사람이 머리가 터져나가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잠들어 있다가 하나씩 처참하게 머리통이 깨져나가는데, 그 소리가 영화 내내 울리던 어떤 소리보다도 커서 사람들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거친 분노와 증오를 아주 선명하게 각인시켜주는 장면이었다. 별의 별 영상물을 보아오면서 비위를 길러왔지만 난생 처음으로 눈을 감았더랬다. 하지만 소리는 여전히 생생했다.
현실과 사랑 모두에 진저리나고 지쳐버린 소년이 기숙사로 향하는 철문을 닫고나자 영화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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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시점에서 인류의 언어를 하나도 모르는 외계인이 우릴 바라보면 이런 느낌일까. 인간사회의 집약판같다는 느낌도 얼핏 들었다. 부정적인 감정들에 쉽게 잠식당하고,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추해질 수 있는 존재들이 작게 훅훅거리고 쉿쉿 거리며 서로서로 위협하고 감정을 강요하고 살아남으려 버둥거리고 부숴버리는. 인간종. 그래서 트라이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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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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