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고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을 것만 같은 흐름이 4권 후반에 들어서야 확 빨라지는데, 모든 게 폭풍우 때 낭떠러지로 쓸려나가는 토사처럼 급작스럽게 맺어진 느낌이다. 
무언가를 넘어서서 성취해 낸 인간승리극이라기 보다는 인간사를 자아내는 요인이 되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집과 우둔함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고. 등장인물들의 치열한 삶을 한숨과 약간의 경의를 갖고 바라볼 수 있었을지 몰라도 끝내 찬탄할 수는 없었다. 
신과 여신의 이름을 걸고 무수히 행해졌던 일들, 아등바등 세우고 확장하고 영광을 얻으며 더 나은 삶을 만들려는, 태어나고 애쓰고 낳고 죽고 하며 이어지는 사람들의 삶의 고리를 내려다 본 듯한 느낌.중요한 것은 어느 신비에 마음을 의지하든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며 주어진 삶을 성을 다해 사는 것. 작가가 말하려던 건 그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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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이 시리즈의 시대적 배경은..한 때 영국땅을 지배하던 로마가 쇠퇴하고, 색슨족이 쳐들어오면서 엠브로지우스의 뒤를 이은 영국의 자생세력 유서와 그 뒤를 잇는 아서가 다양한 부족들을 규합하여 색슨족의 침략에 맞서는 시기. 로마의 통치와 함께 크리스트교가 유입된 지 2백여년이 흘렀고 점점 그 세를 확장해가는 상황에서 아발론을 근거지로 하는, 여신을 섬기는 토착종교는 점점 아발론 섬과 함께 안개 속으로 잊혀져간다. 
아발론의 도움으로 성스러운 검 엑스칼리버를 받아 유서에 이어 왕좌에 올랐으나 한편으로는 크리스트교 신자인 동료들을 지니고 독실한 크리스트교 신자인 아내 그웬와이파와 결혼한 제왕 아서는 부족들 간의 조화로운 공존과 평화를 바라지만, 근본적으로 타 종교를 수용할 수 없는 크리스트교의 성격 탓에 아발론과 크리스트교 각각을 섬기는 두 세력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주인공 격인 아서의 누이 모게인은 여신의 여사제로서 잊혀져가는 아발론의 지혜를 크리스트교에 잠식당하는 땅 위에 다시 세우기 위한 소명을 지닌 인물. 그웬와이파는 크리스트교의 단순. 엄격. 견고한 교리 안에서 보호받고 안온함을 누리고 싶어하는 소박한 여인이지만 사랑하는 란슬롯과 제왕 아서의 정숙한 왕비라는 지위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현실세계의 자연스러운 삶-동식물과 더불어 인간을 조화롭게 한 데 엮고, 그들의 욕망과 생식과 죽음 모두를 순리로서 긍정하고 수용하는, 모든 종교의 신은 하나라고 인정하는 아발론. 
욕망은 걸러져야 할 죄이며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특히 여성은 남성을 꾀어 죄를 짓게 하였으니 더욱 사악하기에 내세를 위해 끊임없이 참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신들의 신 외에는 모두 악마로 보고 배척하는 크리스트교. 
기본적으로 주요 인물들 사이/인물내부의 갈등은 두 종교관의 대립, 두 종교를 섬기는 세력들의 대립에서 온다고 해도 되려나. 
그리고 그 와중에 부각되는, 그 속에서 여인으로서 사는 것. 아발론의 여신을 대변하는, 최고 여사제인 모게인과 독실한 크리스트교도 그웬와이파라는 두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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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크리스천 남성 소설가의 손에 의해 기사도와 무용담 식으로 포장된 게 알려진 거고, 원전 설화는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하리라 여겨지는데. 어릴 적 본 애니메이션이나 BBC에서 방영중인 시리즈물에서 비스무리한 이야기를 다룬 것을 시청하는 것 외엔 자세히 접해본 적이 없다. 젤라즈니의 장편 속에 조금씩 스며있는 설정이나 단편의 소재로 등장한 내용들도 있구나. 하지만 거기 나오는 건 워낙 유명하고 단순한 설정들일 뿐이니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관계가 얼마나 원전에 가까운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작가가 굳이 설화의 복원에 집착할 이유도 없고..그래서도 안되겠지. 
하지만 읽어가다보니 궁금해지는거다. 이 시리즈에서 멀린 타리신, 비비안, 이그레인, 모거즈, 모게인-모르가나, 아서, 란슬롯, 가와인-그웨인, 바란,..아서를 둘러싼 인물들 대개는 혈족으로 가깝게 묶인 이들로서 설정돼 있고, 작가는 그들의 삶을 상당히 복잡다단하게 얽어두었다. 
크리스트교도인 남성 작가의 문체로 씌였을 옛 소설과 달리 모게인, 그웬와이파라는 전설 속 여성의 시선으로 본, 여성 작가가 재해석한 아서왕의 전설, 이라는 홍보문구에 혹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를 갖고 빌려온 것이긴 한데-확실히 그럴듯하게 잘 씌인, 촘촘하게 잘 엮은, 몰입도 높은 이야기긴 하다. 벌어지는 사건들을 겪어나가는 여성인물들의 사고나 감각이 아주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다만 당시 크리스트교와 대비되는 그 고대 종교는.. 시리즈의 초반부터 그다지 내 맘을 매료시키지 못하고 있다. 종교적 맹신이나 맹목적으로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니 견디니 하는 건 저쪽이나 이쪽이나 별반 다를 게 없잖슈..여신의 뜻 좋아하시네-__-..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 땜시롱. 어느 정도 미리 틀이 짜인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예지력과 마법을 속성으로 점해둔 종교를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만 끌고가는 건 어려울 테지만. 작가가 여신을 숭앙하는 그 종교를 크리스트교와 대비해서 한껏 멋드러지게 그려내려 할 때마다 어느 정도는 그럴듯하다고 고개를 주억이곤 하면서도 또 어느 정도는 은근한 반감이 솟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듯..고대 종교라니 고대 종교로 받아야지..
..지금 3권째 읽고 있는데. 뒷표지에서 홍보해대는 여인들의 성취..에 대해선 조금 기대치가 줄어버린 느낌이고. 조금은 아침형 막장드라마 같은 여태까지의 전개를 보면서 어쩌면 아서왕 설화를 색다른 시각으로 접하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묘하게 실망하고 있는 걸 보면 나 아무래도 모게인과 그웬와이파가 좀 더 당시를 초월해서 더 여장부 답게 씩씩하길 원했던 것 같다. 뭣보다 그런 모습이 제대로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말이지. (시대상, 맥락, 다 무시한 슈퍼우먼 스토리를 기대했던 건가.=_=) 게다가 인물들이 죄다 이렇게까지 관계와 신앙의 대립 속에서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고. 하지만 이대로도 충분히 유익하긴 하다. 오래도록 이어져 온 여인들의 삶과, 그만큼 오래도록 그녀들을 겨냥해 만들어지고 붙여진 이런저런 관습적인 시선들, 그 안의 부당함, 그리고 요즘과 달리 큰 힘을 지니고 사람들의 삶을 좌우했을 과거의 종교들, 지금보다 여러모로 힘겨웠을 옛 사람들의 생활상 따위에 대해 이것저것 떠올리게 만드는 시리즈고, 정말 간만에 술술 페이지를 넘기며 즐겁게 읽고 있다. 얽히고 설키는 게 딱 몇 시즌짜리 드라마 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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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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