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문학웹진 거울> 서평 이벤트에서 받은 책.
읽으면서 정리하는 겸 쓰다보니 어수선. 스포일러 왕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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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이 누구이고 어떤 배경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소위 그들이 '동반자'라고 부르는 동물들과 무엇을 하는지, 왜 서로를 탐색하고, 궁극적으로는-무엇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10월의 마지막 밤'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어설프게나마 전체적인 상을 파악하는 데는 페이지를 꽤 넘겨야 했다. 
젤라즈니옹은 처음부터 자세하고 친절하고 장황한 상황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화자 스너프를 통해 실마리를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요기 언뜻, 조기 언뜻 식으로 감질나게 내비칠 뿐이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이해하는 데는 유명한 고딕호러, 추리같은 장르소설들이나 동류의 소재를 다루는 고전영화들에 대한 빠심이 유용할 듯 싶다. 장르적인 지식이 아예, 전무하더라도 끝까지 읽다보면 후반 들어서는 직접적으로 노골적인 힌트가 주어지거나 장황한 설명을 해주기도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큰 문제는 없겠지만, 확실히 재미는 덜할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의 세계관을 장악하고 있는 H.P.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에 대해서는 개괄적인 지식이라도 지니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고..
그렇게 저마다 고딕호러/추리/스릴러 소설이나 영화의 오마주를 담고 있는 인물들에게는 각자 동반자, 즉 지성을 갖춘 소환 동물들이 붙어있고, 자신들의 능력을 증폭시키기 위한 도구를 지녔다고 언급된다. 이들은 또한 은밀하게 폐쇄파 VS 개방파 로 나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10월 31일 보름달이 뜬 할로윈에 벌어질 거대한 게임에서 두 편으로 나뉘어 대결하게 될 것이다.
할로윈에 '현시'하는 그 '무언가'란 한참이나 언급되지 않다가 할로윈이 가까워 오는 후반에 들어서 쏟아지는 힌트나 오마주들을 통해 노골적으로 암시되는데, H.P.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신들이다,('선주신'이라고 나오는데, 원래 '선주신'은 '위대한 옛것들'과 적대하는 오거스트 덜레스의 Elder God을 일컫는 개념이랜다.)
H.P.러브크래프트 팬 사이트 WeirdTales.org(http://weirdtales.org/)의 "Cthulhu Mythos 개괄"에서 본 설명을 인용하자면..
"원시의 지구, 지적 생물이 존재치 않았던 시절에 머나먼 우주에서부터 도래하여 지구를 지배하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을 비롯한 지적 생명체를 창조한 신들은 공포와 광기로 세상을 손 아래 부리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갑자기 깊은 잠에 들어 태평양의 해저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으나, 결코 '꿈꾸지만 죽지 않는' 신적 존재들로서 가끔씩 소수의 인간들에게 실체를 드러내곤 한다. 
인류 문명 탄생 이후 현재까지 수만 여년의 기간, 크툴루 신화의 전체 시간선에 비해서는 지극히 짧기만 한 인류 흥성의 시기는 단지 이 신들이 수면을 취할 동안 이미 예정된 종말의 때를 잠시 보류해 놓은 소박한 평온일 뿐이며, 별이 바로잡힐 때 그들이 다시 지배자로서 지상에 나타나게 되면, 인류는 공포와 고통을 못 이겨 미치게 되어 결국엔 절멸하고 만다는 지극히 두려운 미래상이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곳곳에 암시되어 있다. /
이 무서운 세계관 속의 인류는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만물의 영장도 아니다. 오로지 아득한 과거에 지구에 내려온 Cthulu Spawn, Greate Old One 이라고 불리는 외계의 존재들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창조자의 손에 장난삼아(Joke) 실험과정 중의 하나로 만들어진 하찮은 피조물일 뿐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과, 러브크래프티안 작가들의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 '위대한 옛것들(Greate Old One)' 같은 정체불명의 조어들은 모두 이 신화의 한 부분이다."

젤라즈니옹의 딜비쉬 시리즈는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차용한 판타지다, 특히 후권인 "변화의 땅"에 등장하는 장로신들의 모습과 크툴루 신화의 신들은 닮아 있다.
무정하고 이기적인 신들. 인간을 벗어난 존재들을 심적으로 깡그리 부정하지 못하고 종종 신비에 매혹되곤 하는, 구체적인 신앙을 떠난 종교적인 인간들에게 이만큼 설득력 있게 세계를 설명해 주는 신화도 없을 것이다. 비록 인공의 냄새가 또렷하고 짙은 자조가 섞여 있기는 해도. 많은 이들이 매혹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음...버닝하는 세계관에, 버닝하는 캐릭터들. 그러니께 이 책은 "다같이 즐겨요, 젤라즈니의 마이붐 팬북" 쯤으로 봐도 손색이 없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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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참가자와 입회자가 드러나고 선주신들에 대한 언급까지 오고 나면, 이후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드게임의 진행양상을 연상시키는 고조되는 긴장과 각박해지는 견제가 있고, 최후에 대한 기대 역시 높아져 간다. 캐릭터들의 저변에 깔린 의도나 뒤의 전개는 어떤 식이 될지 대충 상상할 수 있게 되지만, 소설은 막판까지 구체적인 정보들을 장악하고서 서서히 초점을 예리하게 갈아 맞추고 해상도를 높여 나가는 방식으로 허를 찌르고 호기심과 흥미를 무리없이 지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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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드러나기 전에 던지는 암시들을 캐치하고 미리 알아차리는 젤라즈니옹과 장르소설 팬들 간의 짤막한 유희. 
개성 넘치는 '초대받은' 캐릭터들이 새로운 상황 하에서 벌이는 그럴싸한 행동들-탐색과 공방을 좇는 재미. 
패러디와 오마주의 음미. 
그리고 흩어진 조각들이 서서히 짜여가는 퍼즐의 전체상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재미까지. 
즐길거리가 풍부한, 꽤 퀄리티가 높은 젤라즈니판 '장르호러팬북'이다.

무시무시한 보스캐릭터, 신들의 강림에 대한 기대치를 훌쩍 높여둔 것 치고는 마무리가 너무 간략하고 가볍게 끝나버려서 '어라? 이게 다유?' 싶은 아쉬움이 있지만, 나름 유쾌한 결말인 것 같다. 뭐..최후의 날 소환장면의 투닥거림을 보는 게 충분히 다이나믹하고 재미있어서..웅장한 결말이 아니란 데 크게 불만이 없다. 되려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고. 
결국..그간 젤라즈니옹의 소설에서 보곤 했던 착 가라앉아. 땅 파고 들어가는 무거운 고민과 독백들은 의도적으로 덜어진 듯 하고, 할로윈에 걸맞는 기괴함과 환상이 우정과 함께 다정하게 들어차 있는 소설이었던 듯. 재미있었다.

젤라즈니 소설을 주워섬기는 중인 팬으로서는 이번 책은 흡족한 축이었다. 다만 장르소설에 별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 읽기엔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오마주 부분 등은 좀 아리송하고 버거울 것도 같다.

등장인물들과 오마주에 대한 힌트들이 등장할 때마다 주석표시로 두고, 책 뒤편에 좀 더 자세하게 정리했더라면..하고 생각했지만, 그럼 되려 힌트 위치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려나. 친절한 주석은 아니었지만 아주 허술한 주석도 아니었고보면. 소설 속에 차용된 다른 저자들의 캐릭터며 크툴루 신화의 상세내용에 대한 아쉬움과 호기심은 결국 읽다가 던져둔 러브크래프트 전집과 해당 소설들을 읽으며 푸는 게 맞겠지..싶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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