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오프 마실갔다가 건짐. 전체적으로 약간 눌려 휜 자국이 있지만 펼친 흔적이 거의 없는 아주 깨끗한 책이었다. 양장된 표지를 펼칠 때의 약간의 저항감, 책장 구석에 가지런히 말려 들어있던 손때 탄 흔적이라곤 없는 책갈피줄까지. 누군가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는-적어도 완독은 한 적 없다는 뜻일까;?
여튼 모 단편선에서 읽은 '파리의 4월' 이후 별 관심이 없다가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에서 눈이 뜨인 이후 제대로 읽어보게 된 르귄여사의 첫 장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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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로캐넌의 세계' 도입부, 단편 '셈레이의 목걸이'를 '바람의 열두방향'에서 읽었다.
'헤인시리즈'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도 언뜻 본 적이 있고.
전개 중에 '헤인시리즈'에 등장하는 듯한 헤인, 로캐넌 등의 행성이 이 책의 무대배경이 되는 '게센'과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니 이 책도 '헤인 시리즈'와 연관이 있는 모양)
소설의 배경은 행성 '게센, 행성;겨울'이다.
본격적인 내용 전개에 앞서 행성 '헤인'과 헤인에서 비롯한 다행성 공동체 '에크멘'의 존재가 전제된다.
헤인이라는 아주 오래된 행성이 있다. 헤인의 주민들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과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무척 오래 전부터 지구 등 여러 행성에 진출하여 적응하여 각 곳마다 나름의 문명들을 발달시켰다. 이후 그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와 새로 발견된 행성들의 고등지성체들에게 자신들의 존재와 행적들을 널리 알리고, '에크멘'이라는 문명 공동체를 만들었고, 에크멘에 가입된 80여 개의 행성과 3000여 개의 국가들 간에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문물과 문화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게센의 주민들은 아직 에크멘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다. 
아주 오래 전, 헤인 주민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게센 원주민들은 헤인인들에 의해 유전자를 조작 실험을 당한 바 있다는데-그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 행성 게센의 거주민들은 모두 양성체이다. 모두 한 몸에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는 자웅동체. 지구인과 비슷하지만 키가 좀 작고, 갈색의 피부를 지녔다. 달에 한 번, 2~3일 정도 '케머' ; 발정기 때 랜덤으로 남녀가 갈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겉으로 성적 구분이 드러나지 않고, 성욕도 거세된 채다. 
남녀의 신체적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관습들, 남녀 사고의 동질성과 다름, 여성의 그룹과 남성의 그룹의 특성, 여성의 정치와 남성의 정치방식, 성욕의 발현에 있어서의 차이..
이것들은 보통 남성과 여성으로 갈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화두다. 때론 순수하게 궁금해 하며, 가끔은 논쟁하다 불쾌해하면서 '성적인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인간이 그저 각각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존중받는다면' 하고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런 사고실험의 뉘앙스가 짙게 풍기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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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주인공은 '에크멘'에서 '게센'으로, 평화로운 자유무역-지식과 문물에 대한-을 맺고자 파견된 단 한 명의 사절 '엔보이'이다. 지구 태성의 흑인 남성으로, 이름은 '겐리 아이'. 그는 게센에 있는 국가들을 상대로 자신과 에크멘에 대해 알라고 동맹을 맺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은하계에서 유일한 양성자들이 이룩한 세계를 탐방할 기회를 갖는다.
눈으로 뒤덮인 대륙들, 일년 내 겨울인 극히 차가운 기후, 독특한 식생, 봉건제가 살아있는 왕정국가 카르하이드와 친교그룹들로 이뤄진 오르고린-게센의 대표적인 두 국가. 그들의 영토분쟁-하지만 국지적인 분쟁으로 끝날 뿐 한 번도 전쟁이 일어난 적은 없다(양성성 탓인지, 아니면 혹독한 기후 탓인지). 현재를 원년삼아 과거를 셈해가는 역법, 생리적 주기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한 달의 날짜계산, 원시종교 한다라와 거기서 파생된 종교 요메시. 기후로 인한 독특한 의식주 양태, 양성인들의 생식방법과 성문화 등등. 
겐리는 이전에 행성 게센을 다녀간 조사자들의 보고서와, 책이 드문 대신 게센에서 널리 유통되는 음성 테입들을 검토하면서, 직접 경험하면서 조금씩 게센인들의 삶에 더 익숙해져 가고, 그를 토대로 게센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동맹을 제시할 방법을 고심한다.
처음 그는 왕국 카르하이드의 고관 에스트라벤의 안내와 협력을 받으면서 카르하이드 왕과의 대면을 준비하지만, ...동맹에 이르기까지의 길은 험난하다. 상황은 때로 미묘한 불안, 긴박한 위험들을 동반하며 복잡하게 흘러간다. (결국은 어찌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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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행성.
하지만 묘사된 게센의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로 꼼꼼하고 세밀하다. 
인간사회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기 위해 오지의 부족들을 관찰하며 논문과 보고서로 결과를 남기던 인류학자들의 행적을 우주적인 범위로 확장한 버전같달까. 가상이긴 하지만. 지구의 생태와 인간사회를 이루는 면면을 따서, 새롭게 걸맞는 것들로 대응시켜, 또다른 인류가 살아가는 행성이라는 형태로 구성해 놓았다. 꽤 그럴 듯하다. 
일반적으로는 무섭도록 혹독한 기후에서 막대한 영향을 받는 것으로(작가가 양성성이란 측면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서 환경적인 다양성을 줄인 것 같다), 양성인들로서의 공통적인 습성이나 문화에 대한 묘사에서는 아직은 남성중심적으로들 많이 돌아가는 지구사회에다 여성성을 확대적용한 모습으로 그려낸 것 같다고 종종 느꼈다(약자에 대한 자연스런 배려, 수동성, 덜 목적적임, 전쟁의 부재 같은 이런저런데서). 글고보니 게센인들의 '프로그레서:체면, 위신, 혹은 그것들을 발휘할만한 자격'에 대한 태도도 인상적이었는데..이건 어떻게 봐야할까. 보통 평판에 민감하고 위계를 중시하는 남성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걸까?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조합하고 조율한 듯한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간 듯한 면도 있었다. 자웅동체라는 데서 연원하는 듯한 게센인 특유의, 어딘가 일원론적인 통찰을 담은 직관적인 사고체계나-그걸 강하게 반영하는 듯한 고대종교 한다라에 대한 묘사들이 그것. 꽤 흥미로웠는데. 좀 심오하기도 했고. 소설의 제목도 거기서 기원하는 것이다. 그 부분들에 대해서는 다시 몇 번 읽어봐야겠다. 그럼 요모조모 이해가 새로울지도.
당연하겠지만. 역시 군집, 그 안의 위계, 신앙, 예술, 사랑, 복잡한 이해관계와 대립, 분쟁 등은 인간이 있는 어디에나 일어나는 일이고, 그건 동일한 성으로 구성된 사회에서도 다를 바가 없겠지 싶다. 하지만 그 양상은 또 당연하게도 각자 독특한 인성을 갖춘 개인마다, 그들이 이룬 각각의 사회마다 다양한 모습일테고..겐리가 만난 게센인들이 저마다 다르고 카르하이드와 오르고린이 여러 면에서 색다른 문화와 국민성을 지닌 것처럼 말이다.
게센에 대한 꼼꼼하고 생생한 묘사도 그렇지만, 인류에 속하는 일원이란 점 외에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 서로에게 외계인인 겐리와 에스트라벤 둘 사이의 교류 역시 강하게 맘을 끌었다, 그들이 휩쓸리는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들과 생사를 건 활극 역시 아주 생생하고 정교하고 치열한 것이.. 아..책 후반부에 나오는 두사람의 여정은 지금도 생각하면 춥다;o;

간만에 꽤 괜찮은 책을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헤인시리즈들을 하나씩 찾아볼 만도 하다.

+첫 장에 외삼촌이 세 조카들에게 03년에 선물로 주었다고 적혀있다. 이 책을 사랑했다는 게 느껴진다..역시 책 선물은 읽을만한 사람을 좀 가려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책이 중고서점에 팔려버린 걸 알면(더군다나 정말 한 번도 안 읽었다면 더) 그 외삼촌 좀 씁쓸할지도. 그래도 그 선물은 돌아 돌아 내게로 왔고..감사. 북오프에서 이렇게 안 질렀으면 훨씬 먼 훗날에나 읽었을 가능성이 컸다;

Posted by 에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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