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시간 사람들이 꿈꿔오고 투쟁했던 굵직굵직한 목표들인 계급철폐. 산업화. 민주화. 같은 것들은 모두 달성되었고. 위대한 이론과 사상도 어지간히 다 나온 더 그레이트 화이트 월드. 더 이상 목숨걸고 투쟁할 거리도 없고. 새로운 철학이랄 것도 나올 길 없고. 소소하게 조정하고 답습할 거리만 남은 세상에서 야망 있는 젊은 세대들은 자신만의 위대한 위업을 이룰 기회를 박탈당했다. 피땀흘려 현재를 이룩한 윗세대들이 가르치는대로 따르기를 요구받을 따름. 머리를 더 쥐어짜더라도 보다 더 나은 대안이 나올 길이 없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이런 완성된 체제 안에서 보다 더 잘 순응한 모습이 성공이라 세뇌받고, 자신들에게 할당된 지엽적인 몫을 얻어내기 위해 서로 쓸데없이 치열한 경쟁을 치러내야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윗 세대의 편의에 따라 이용당하고, 팽당하고, 좌절감을 맛보지만. 결국 사다리를 기어올라 꼭대기에서 얻은 성공이래봤자 그들이 원하던 것과는 거리가 먼 초라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재능있지만 작은 성취따위엔 만족할 수 없던 젊은이 하나가 이에 반기를 내건다. 그는 윗세대들의 기준으로 충분히 성공하고도 남을 천재적인 인물이지만, 젊은 세대가 지닌 다양한 시도와 야망을 눌러 죽이고 흡수해 표백시켜버리는 작금의 세상, '더 그레이트 화이트 월드'에 대해 전면적인 거부를 선언하고는 자살한다. 그가 대학시절부터 교주같은 카리스마와 논리로 자신의 오랜 지인들,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탓에, 그의 죽음을 필두로 그 지인들 역시 하나하나 자살선언에 동참한다.
그만하면 성공했다는 말을 들을 만큼 뛰어난 성취를 이룬 직후의 젊은이들이 24시간의 텀을 두고 자살선언을 하고 자살을 감행하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 삼성전자 특채합격자, UCLA합격자, 치열한 능력검증 끝에 후계자가 된 재벌가 자제에 이르기까지. 윗세대가 말하는만큼 완벽하지 않은 세상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자살선언과 실행궤적은 인터넷을 타고 흐폭풍을 부르고, 이에 뜻을 같이하는 자살자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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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조절할 소소한 문제들 외에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치명적인 문제가 없는 사회에서, 인생을 내 걸 굵직한 목표가 사라진 세대. 빈틈 없는 가치를 내건 사회에서 순응하며 살 도리밖에 없는 세대..라. 적당히 조율할 문제라고 꼽은 것들도 충분히 두통을 일으키는 것들인지라 별로 공감할 수 없던 대목. 양성평등이나 소수자차별 같은 인권문제나 수정자본주의의 레버를 어느 쪽으로 돌리는가의 문제도 한국에서 얼마나 무시무시한데. 그러지 않아도 될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로 오랜기간 꾸준히 부당한 피해를 입고 해마다 죽어나간다. 글고..우주의 탄생비밀이야 밝혀졌다지만 아직 외계생물체 하나 못 찾았고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우주선도 아직 안 나왔구만 목숨 걸고 사고를 불태우며 발견하고 발명할 거리? 없지 않은데.
다만 지금의 젊은 세대가 지나치게 작은 파이만이 허락된 세대라는 데에나 소설 속 젊은이들의 감성에는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꼈다. 어느 세대보다도 오래 투자받고 교육받은 탓에 똑똑하고 재능있지만 9급 공무원, 대기업 취업자리에 젊은이들이 어마어마한 경쟁률로 몰리는 현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들어간 이들이 노력한만큼 행복한가 하면 의문이 있고.
이렇게 되면 88만원 세대론과 겹치는 듯 하네. 하지만 88만원 세대론에서 내건 세대간 대립은 근거가 빈약하다는 얘기가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소득수준에서 분배가 제대로 안 되고 사회안전망이 부실하고 정책적인 뒷받침이 안 따라주는 탓에 계급고착화가 되는 거고 이제 취업하게 되는 청년층에서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거지. 작가가 얘기하는대로 윗세대의 성취와 장악 때문이라고 풀 건 아닌 것 같다. 자살자 중 굳이 재벌청년을 넣어 세대론을 탄탄히 하려 애쓴 점은 알겠는데. 그도 세대론보다는 경제적 계급을 공고히 하려는 재벌가 중에서 드물게 나오는 비극 정도로 풀 수 있지 않을까. 제2의 후계가 될법한 뛰어난 누이도 있어 중압감을 벗어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 같은데 외면하는 것이나 자살을 결심하는 이유로 사이코패스 설정을 굳이 덧붙인 것도 약간 억지스럽다고 느낀 인물. 타 젊은이에 비해 남들 우러르는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는 디폴트로 해결된 상태고 몇 차원 건너뛰어 숭고한 목표를 추구하며 살 수 있는 기회도 큰데. 정말로 야망을 채워줄만큼 가치있는 목표가 아니어서? 매력적이지 않아서? 앞에서도 적었지만. 글쎄.. 딴 애들은 고시원과 원룸과 알바의 지리멸렬한 얘기와 고시생활 얘기를 주구장창 늘어놓으면서, 부친같은 카리스마를 유지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사이코패스라니.
그러니까. 책 속 인물들이 겪는 좌절과 암담함은 어느 정도 비슷하게 체감했었고 해서 어느 정도 공감하겠는데. 윗세대가 만든 완벽한 더 그레이트 화이트 월드 운운 하는 전제는 좀 갸우뚱갸우뚱 하다.
장강명을 누군가가 추천하길래 한 권씩 읽어보고 있는데. 기자출신이라 그런지 최근의 세태에 대한 정보를 차곡차곡 모아서 분석해 내려는 면이 호평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이 싫어서, 는 소설이라기보다 한국 젊은층의 이민 러쉬에 대한 르포같았고, 이번 표백, 도 인물들을 내세웠다 뿐이지 작가가 분석한 내용을 노골적으로 인물이 대신 말해주는 형태라서.이 사람 소설들은 소설의 탈을 쓴 월간지 칼럼?스럽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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