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에 대한 것이 최근의 화두다. 따로 모여서 속닥거리지 말고 트인 교무실에서 모여서 이야기하자, 함께 재밌게 지내자,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는 선배가 생겼다.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다. 든든하기도 하다. 다만 되려 이러저러한 점이 구리다고 꺼내지 못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가 원하는 것이 뭔지는 알지만. 그의 노력도 알지만. 당장 불편함을 꺼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므로. 공손한 접근에 대한 프로세스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신뢰 체계가 망가져 있었다. 수용과 예의를 넘어 이쪽의 의견도 반영되리라는 신뢰가 경험을 통해 더 생기지 않으면, 되려 판옵티콘이 될 수도 있다.
아이와의 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상대가 아직 적은 나이에 미숙하니까 원만하게 지내기를 선택한다면 어른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 수밖에 없고, 상대가 이 쪽에 지닌 적대적인 신념-너는 나를 미워하고 있잖아-을 없애주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하소연에는 공감이 필요할 뿐 해결책을 꺼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 자꾸 반복되는 화제거리라 말해보았더랬다. 누군가 충고는 하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건 나에게 가능한 이야기고, 그는 이 생활도 나름대로 견딜 수 있으니 결코 만만하게 보이지 않겠다고, 서열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화제는 교육관으로 넘어갔다.
때묻지 않고 순수하고, 차선이 아닌 최선을 향해 가는 모습이 대단하단다. 하지만 자기는 다르단다. 세상에 나쁜 인간이 정말 존재한다고 믿어야 이 생활을 오래 한다고, 교사 욕을 적은 아이에게 고소할 거라고 협박한 선배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쁜 아이에게는 나쁘게 대하고 만만하다고 보여지지 않아야 민주든 뭐든 가능하다는 그의 말을 따르겠단다. 하지만 나의 교육관과 자신의 교육관은 다를 뿐인 것이고, 그녀는 그 점을 내가 존중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이상만 높은 몽상가로 비칠 뿐이라는 걸 제대로 알았다. 그리고 그 이상을 꺼내보일 때마다 동료들은 그것을 자신들에 대한 비난으로 여긴다는 것을.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 없는 이상은 공허할 뿐이다. 알맹이를 채우고 실적을 내보이지 않으면 그냥 삽질하는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학교는 성장 대신 무기력만 남은 공간이 되어 간다. 계몽의 공간도, 신분상승의 발판도, 능력을 발견하고 연마하는 공간도 되지 못한다. 아이들은 억지로 몸만 묶여 지내면서 물리적으로 다른 이들과 충돌하며 지낸다. 수업붕괴와 학교 폭력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머리를 모아야 하는 교사들은 그러나 저마다 외따로 떨어져 있다. 더 나은 교육에 대해 화두를 꺼내고 토론하는 것은 '저마다 다른 교육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공격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지며, 교육적이지 않은 병폐를 지적하는 것은 '분란을 조장하는 행위'로서 배척당하기 일쑤다. 교사들은 저마다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더 이상 수업과 교육관과 교육현장의 위기에 대해 토론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상념과 취향에 대한 신변잡기들을 나누며 공허하게 헤어진다. 이 때문에 무언가 시도하려는 교사들은 더 분주해지고, 자칫 사고라도 벌어지면 독박을 쓴다. 아무도 나설 수 없고, 나서면 망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교무실은 침묵하고 교사들은 서로 소통을 차단한다. 타인이 내 삶에 끼어드는 것을 경계하며 자신을 타자로서 드러내는 것을 경계한다. 공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을 넘어 다른 의견을 제시하거나 조언하는 것 자체가 개인적인 공격이자 예의 없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교육관에 대한 견해차는 명백히 정치적인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문화적인 차이이자 취향의 문제로 순치되어야 한다. 정치적인 차이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조정되는 것이라면 문화적 차이는 관용과 개성의 존중으로 조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의바른 행동이기 때문이며 '교사 됨'에 대한 공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뇌하는 모습 자체가 다른 교사들에게는 '교사 됨'에 대한 공격이 되며, 때문에 교육현장에서 받는 상처와 고통을 드러내고 나누는 일은 의식적으로 기피된다. 서로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하며 단속한다. 교육현장의 교사들은 자신과 타자와 제도에 대한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자기검열을 통한 자기단속이 횡행한 교무실에는 드라마와 쇼핑 같은 문화적인 것들, 취향만이 남는다. 상처와 고통은 일상적인 것이 아닌 병리적인 것이 되고, 교사로서의 고통과 상처를 나누는 공간은 학교 밖이 되어 간다. 교사들 사이에서조차 교육적 만남의 공간으로서 학교는 공동화되고 있다.
그러나 타자와 만나지 않고 교육은 불가능하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는 내가 가르치는 것을 상대가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내가 말하는 것을 상대방이 알아들을 것이라 전제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환영하고, 타자성을 대면하고 만날 때, 가르치려는 것을 그 언어가 아닌 학생들의 언어로 우회를 반복하여 가르칠 때, 이제껏 학생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어 아직 그들이 생각해보지 못한 어떤 것을 제안할 때, 학생의 언어를 이해하려 노력할 때 교사는 학생들과 교육적으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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