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단편선 번역이 새로 나왔다기에 벼르다가 지름. 아무래도 이 작가도 번역이 되는 족족 찾아 읽게 될 듯. 이번 주말에 스티븐 킹 단편선 다 읽고 나면 이어서 읽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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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표지에 페미니즘 SF, 라고 크게 적혀있다. 나야 망설이지 않고 질렀지만.
최근 인터넷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여성들만 페미니즘 서적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할 때가 있다.
작품들에 대한 인상은 "체체파리의 비법"과 비슷한데, 여기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나는 듯.
희망에 찬 아기자기하고 씩씩한 모험, 지난하고 고통에 찬 저항, 끝까지 쥐고 가고자 하는 굳은 신념, 고아한 정신들이 그저 오래 기억되지 못할 숭고한 한 때로 스러져 가는 허무. 인간에 대한 조소, 비참, 절망. 그런 정서가 담긴 단편들이랄까. ㅎㅎㅎ
아주 매력적이다. 묘하게 공감하고,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삶을 종종 비극적으로 보게 되곤 하는 입장이라면 상당히 매저틱하게 즐거울 것이라고 확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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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게 되는 결말을 지닌 단편들인데. 상당히 매력적이다.
귀차니즘이 좀 잠잠해질 때 하나 씩 여기 적어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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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page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그녀의 날씬하고 강인한 다리 한 쌍이 '인디언 걸음'으로 그녀 몸을 실어 날랐다. 신선한 비에 충만한 밤, 그녀의 기분은 이제 구석구석 상쾌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하고 지칠 줄 모르는 자신의 몸을 사랑했다. 물론 배달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 달빛으로 빛나는 이 근사하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젊고 건강한 몸으로 밤길을 거닐다니.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발걸음도 가볍게 타박타박 걸었다. 여보시오, 자매님들! 편지나 소포 없나요?
...
(p.128)
그녀는 길목에 있는 건물 잔해를 쏜살같이 비집고 통과하면서, 이 아름다운 자매에게 기쁘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빛이 가득했다.
"어디로 가세요? 산책을 나왔나요? 저는 배달부예요." 그녀는 자매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설명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친구가 사방 천지에 있었다. "편지나 소포 없나요?"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평화롭게 서 있는 낡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들을 피해, 함께 성큼성큼 걸어서 옛 도로의 중앙분리대를 따라 내려갔다. 길 한쪽에는 구부러진 이정표에 '댄 라이언 고속도로, 오하이오 공항'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쪽으로, 디모인까지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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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여자들-
"밤중에 나다니는 여자들은 미친 거지. 왜 밤에 나가서 봉변을 당하는거야."
..에 대한 직접적인 조롱이자 자기파괴적인 단편?ㅋㅋㅋㅋ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작가는 "그래. 밤에 다니는 미친 여자를 그려볼까." 그랬을까?
근데 미친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가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지 보면..
왜 밤에 두려움에 떨고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지. 미치고 팔딱 뛸 것 같아 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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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page
"내가 말해주려는 건 말이야, 이건 함정이라는 거야. 우린 초정상 자극에 맞닥뜨렸어. 인간은 이계교배 생물이야. 우리 역사 전체가 이방인을 찾아내서 임신시키려는 길고 긴 충동이야. 아니면 이방인에게 임신당하거나.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마찬가지니까. 다른 피부색, 다른 코, 다른 엉덩이, 뭐든 간에 남자들은 그 다른 것과 성교를 하든지 시도하다가 죽어야 해. 그건 내재된 충동이야. 그리고 그 이방인이 인간이기만 하면 잘 돌아가지. 수백 년 동안 그런 방식으로 유전자가 순환했어. 하지만 이제 우린 뒤엉킬 수 없는 외계인들을 만났고, 시도만 하다가 죽기 직전이야.... 내가 내 아내를 만질 수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이봐. 새에게 자기 알처럼 생겼지만, 더 크고 더 화려한 가짜 알을 주면, 그 새는 자기 알을 굴려서 둥지 밖으로 버리고 가짜 알을 품는다는 거 알아? 그게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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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어나 보니 나는 이 차가운 언덕에 있었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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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page...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무자비하게 구체화하는 힘이 더욱 높이 솟구치며 어렴풋이 불쾌한 존재감을 일깨웠다. 먼지 속의 실체 없는 동요가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다만 그것은 차가운 바윗덩어리를 유령처럼 감싼 죽은 생명의 막에 두드러진 결절 같은 형태였다. 도달할 수 없이, 고립되어...그는 다른 존재에게 접촉해보려다가 엄습하는 새로운 두려움에 소스라쳤다. '저들도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까?' 고통이 진정으로 우리의 신경에서 가장 격렬한 불이었던가? 고통만이 죽음을 넘어서까지 그 불길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은, 환희는 어떻게 되고? 여기에 사랑이나 환희는 없었다.
그런 확신이 밀려들자 그는, 이전에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았던 그는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지상의 모든 고통이, 무효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 스탈린그라드와 살라미스에서, 게티즈버그와 테베와 됭케르크와 하르툼 전투에서 망가진 영혼들은 영원히 절뚝거린단 말인가? 라벤스브뤼크와 운디드니에는 아직도 학살자의 공격이 떨어진단 말인가? 카르타고와 히로시마와 쿠스코의 망자들은 여전히 불타고 있단 말인가? 유령이 된 여인들이 오직 다시 한 번 강간으로 고통받고, 다시 한 번 아기들이 살해당하는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깨어난단 말인가? 모든 이름없는 노예가 아직도 강철의 아픔을 느끼고, 한 번 날아갔던 모든 폭탄과 탄환과 화살과 돌은 아직도 비명을 지르는 목표물을 찾아 날고 있단 말인가.... 끝도 위안도 없는 잔학 행위가, 영원히 계속된단 말인가?
...
(p.430)
'우릴 죽게 해줘!' 하지만 붕괴해가는 그의 정체성은 저항을 더 버텨내지 못하고, 그저 그게 사실이라는 것만, 견딜 수 없게도 모두 사실이라는 것, 이 모든 일이 전에도 행해졌고 다시 행해질 것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다시, 또다시, 영원히 되풀이되리라. 자비 없이.
그리고 무너져내리는 층들을 뚫고 가라앉으면서 그는 오직 절망밖에 붙들지 못했다.
...외계 생명이 그들을 버리자 다들 최후의 암흑을 향해 가라앉고, 또 가라앉고... 그러다가 이해할 수 없는 비탄과 더불어 실재하는 마지막 한순간 그는 그 자신이, 혹은 그 자신이었던 배열이 새벽, 자갈 위에 부츠를 딛고, 손은 녹슨 픽업트럭에 얹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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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연기는 언제까지나 올라갔다 中-
윤회와 영겁의 고통..뭐 그런 게 생각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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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page...
그는 미소를 짓다가 뺨이 자갈에 찔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길 아래 깔린 황갈색 자갈에 뺨을 대고 누워있는 모양이었다. 외계의 공기가 타는 듯한 목구멍에 도움을 줬다. 그는 계속 그 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저 푸른 라일락 빛깔은, 저건 하늘일까? 티 하나 없이 매끈했다. 구름도, 새도 없었다.
저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들판? 이 마법 같은 통로는 무슨 용도일까? 길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초공간장?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존재는 없었다.
다이얼 표면 위쪽으로 시선을 올리니 투명한 한 쌍의 나선 같은 장치가 보였다. 한쪽 코일에는 번쩍이는 액체가 가득했다. 다른 한쪽 코일에는 그저 번득이는 불꽃 맻 개만 있었다. 그가 지켜보는 동안 빈 코일의 불꽃 하나가 꺼지더니 액체가 가득한 쪽 코일이 깜박거렸다. 이어서 또 하나가 꺼졌다. 그는 지켜보며 생각했다. 간격이 규칙적이다.
그러니까 저건 시간을 재는 장치였다. 에너지 저장량을 표시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거의 끝이 가까웠다. 마지막 불꽃이 꺼지면 문이 사라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문은 여기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린 걸까?
양 몇 마리, 반쯤 죽은 토착민 하나 정도나 받아들리면서, 클리본 산의 짐승들이나 맞이하면서.
이제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 오른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왼팔과 다리는 무거운 짐 뭉치나 다름없었다. 그는 몸을 질질 끌고 거의 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기어갔다. 1미터만 더 가면...그러나 이제는 팔에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끝났다.
어제만 산을 올랐더라도 좋았을 것을. 스캔을 하는 대신에 말이다. 스캔은 물론 비행기가 클리본 산 주위를 돌면서 시행했다. 하지만 여기 이 길과 문은 비행기로 볼 수가 없었다. 그때는 여기에 없었으므로. 이 길은 뭔가가 저 아래 첫 번째 장벽을 가동시키고, 두 장벽을 다 밀고 올라올 때만 존재한다. 아마도 산을 오를 의지가 있는 커다란 온혈동물이 올 때만.
'컴퓨터는 인간의 뇌를 해방시켰지.'
그러나 컴퓨터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직접 클리본 산의 바위를 기어오르지 않았다. 오직 의문을 품을 만큼 멍청하고, 돌 위에 엎드려 악착같이 지식을 구할 만큼 멍청한 사람만이 여기에 왔다. 위험을 감수하고, 경험을 하고, 혼자 남은 사람만이.
값싼 방법이 아니었다.
빛나는 배는, 그 우주선 안에 갇힌 성간 과학자들은 가버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에반은 이제 발버둥 치기를 그만뒀다. 그는 가만히 누워서 외계 시간 장치의 끄트머리에서 빛나던 불꽃이 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곧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소리라고 할 수도 없는 희미한 소리와 함께, 빙하가 오기 전부터 클리본 산에서 기다렸던 길과 그 길에 딸린 장치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그 길이 사라지자 바람이 다시 격렬해졌지만, 그는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아주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그 얼굴과 몸의 뼈가 언젠가는 클리본 산의 빈 바위에 흩어진 금빛 자갈과 뒤섞이게 될, 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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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잃어버린 길을 따라 여기에 왔네 中-
강렬한 허무감. 아주 인상적이었음.
삽질들이 모이고 모이고 모여서 맞이하는 발견과 발전의 역사?를 시사할 수도 있겠고. 과학적인 것, 기계에 대한 맹적인 신뢰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겠고.
아무튼 굉장한 단편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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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page
"너...익었어?"
그의 마음속에서 부드러운 틈이 생겼고, 그 갈라진 틈 사이로 자시느이 겁에 질린 덩굴손같은 마음 줄기가 뻗어 나가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는 미끄러지며 깜깜한 밝음 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광대한 비공간이었다. 거기에는 은하들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유령 같은 목소리들이, 쫓을 길 없이 표류하는 사상의 실마리들이 떠돌았다. 시간을 잃어버린 그 광대함 속에서 떠도는 뭔가가, 비존재의 바람에 실린 실체 없는 에너지의 섬세한 그물망 같은 것이 그를 살살 끌어당겼다. 생명? 이건 죽음의 생명 같은 건가? 그것이 그를 끌어당기고 또 끌어당겼다.
아니야! 아니야!
겁에 질린 그는 자신을 다잡았고, 깨부쉈고, 싸웠다. 그는 헐떡거리며 노이온의 가지 아래 네 발로 엎드린 채 현실로 돌아왔다. 빛과 공기. 그는 숨을 몰아쉬며 흙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그는 자기 자신이 끊어버린 연결선을 찾아 마음속을 살폈다. 연결선은 거기 없었다.
"맙소사, 그건 네 불명성인가?"
노이온은 아무 말 없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그것의 기운이 빠졌다는 걸 알아챘다.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한 차원을 열었던 것이다.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를 초대하기 위해.
그때 그는 이해했다. 그의 세 번째 소원,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것일 수 있었다.
그는 해가 아래쪽을 향해 달리는 동안 자신을 둘러싼 생명의 소리들도 듣지 못한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혼자, 다 벗어버리고 간다... 간다, 혼자... 그 목소리들은 뭔가 의미가 있었을까? ...간다. 영원히, 그 기묘한 상태를 만나기 위해... 혼자 간다. 나의 실재가, 나의 진정한 자아가 혈통과 자식 생산과 돌봄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져서....
그런 생각이 희미하지만 달콤한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았다. 간다. 혼자, 자유롭게.... 사람의 본심에 담긴 다른 목소리. 그의 가장 인간다운 부분이 한구석에 품은 가장 깊은 갈망. 종의 폭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영원히 사는 것....
그는 하늘이 닫히는 것을, 자신의 동물적 심장에 살아 있는 피가 맥동 치며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신음했다. 하지만 그는 동물, 그것도 인간 동물이었고, 새끼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 그는 혼자 갈 수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너의 길은 내 길이 아니야. 난 내 피붙이들과 함께 여기 있어야 해. 우리, 다시는 이 얘기 하지 말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나를 도울 수 있다면, 내 새끼들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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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지막 오후 中-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단편선을 두 개로 나누어 출간한 거라고 봤는데. 이 단편선-체체파리의 비법+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을 흐르는 정서를 보면. 작가가 인류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고, 진화하는 일련의 과정-특히, 남성이라는 주류가 이루어가는 목적지향적, 번식지향적, 파괴지향적, 약육강식적인 역사를 일종의 동물종의 번성과 사멸의 번복으로 바라보는 듯한. 역겨움과 조소, 허무..랄까 진저리 같은 것들이 강하게 느껴지는 단편들이 여럿 있다. 아니..대체로 모든 단편에 담겨 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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