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2015년의 나. 참 순수하고 너덜너덜했구나.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완벽하게 선하고 순수하지 않다는 이유로, 완벽하게 유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참 스스로를 가만 못 두고 괴롭혀 댔구나. 다른 이들이 철저하게 실리를 따지고 앉아 있을 때에도. 완벽한 성자가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죽고 싶어했었네.
스스로에 대해 적당히 관대함을 갖추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여전히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 어처구니 없는 연민을 느끼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런 연민을 베풀 수 있어 다행이다.
세월이 가면 가는대로 얻어지는 것이 어쨌든 있긴 한가봐. 조금씩은 살기 수월해진다는 감이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태어난 애들에게 어쨌든 따뜻함을 주고 싶고, 세상이 좀 더 따뜻하길 바라던 나는, 그 때 스스로를 바라보던 것 이상으로 호감형이구만. 왜 그렇게 나를 싫어했을까. 매일 매일 울면서 거기 익사하고 싶었던 나는.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있고. 울증에 혹사당한 탓인지 단기 기억력이 참 많이 날아갔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무도 네 완벽함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에게도 관대한데. 너는 왜 그렇게 완벽해지고 싶었을까.
아이들은 5학년 수준의 교과서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기초적인 읽기도, 사칙연산능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강압적인 교사들 아래서 적당한 때우기 식 수업만 받은 상태였고, 겉보기에만 집착하던 공모제 교장의 체험중심 교육 기치 하에 온갖 전국적인 체험학습으로 연중 들떠 지냈다.
부모들은 바빴고, 거진 버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이들을 떠나 있었다. 애정결핍과 외로움,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몇몇 아이들은 심하게 뒤틀려 있었고 불만을 폭력적으로 표출하고 싶어했다. 욕과 물건던지기와 타인에 대한 폭력.
3년 전에 배웠어야 했던 것들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집중하고 배울 수 있을 리가 없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부드러운 훈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냥 날뛰는 건 예측할 수 있는 수순이었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밤 8시까지 끌어다놓고 가르치는 것도 한두 명이라야 가능하지, 더군다나 2~3학년 수준의 아이들 7명을 하나하나 그렇게 건사하는 건 한계가 있다.
누구라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 모든 상황이.
교장의 연줄로 들어온 나이 많은 교사들은 신규들의 어려움을 외면했고, 승진점수 챙기기에만 급급했으며 업무를 기존에 있던 젊은 교사들에게 떠넘김으로써 교장을 위시한 원로들과 젊은교사들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두 부류 사이에서 온갖 빈정거림과 투덜거림, 실제로 날선 협박과 욕설이 횡행하던 시기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너 따위 내가 밟아버릴 수 있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했다던.
교실의 소란에 대해 교감, 교장 누구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들지 않았다. 의욕없는 아이들의 욕설과 행패에 시달려가며 최대한 인격적인 대응을 놓지 않으려고 기를 쓰다 못해 반쯤 미쳐서 수 차례의 교통사고와 자살 직전까지 갔던 너 외에도, 다른 신규들 역시 아이들의 오랜 부진과 학습태도 불량으로 심각한 우울감에 시달렸었다. 교실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은 각자의 몫이었고, 그들의 잘못이었으며, 원로교사들과 관리자들 모두 침묵 속에 그 우울을 방치해두었다. 못해먹겠다며 불평하며 학교를 뛰쳐나가는 것 보다, 속으로 곪아가며 조용히 미쳐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여겼겠지.
자살한 여교사 이야기를 전해 주면서도, 모든 것이 네 잘못이라고 하는 네 말에 굳이 부정해주지 않않지.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이득을 챙겼다. 그들은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양보하잖아, 유능한 우리가 점수를 가져가는 거야. 서열정립은 평화로웠지.
인수인계 없는 업무. 어느 선까지가 자기 업무인지 지침도 없고, 기본 계획서조차 없어서 인디를 겨우겨우 뒤져가며 새로 만들어야 했던 업무 계획서들. 관사 사는 인간들 사이의 치졸한 갈등과 눈물. 사사건건 간섭하는 행정실과의 갈등. 교장과의 갈등. 회식자리에서의 성희롱. 그밖의 온갖 스트레스들.
어떻게 살아남았던 걸까.
학교의 모든 불화와 소동을 내 잘못이라고 여기면서 미치지 않았던 것이. 참 신기하고.
죽지 않았던 것이 신기하다. 2, 3시간씩 밖에 잠들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지면서 기억력 감퇴를 얻었지만.
지금의 신규들이, 교실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다툼과 소란을 그들의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씁쓸하기도 하고.
물론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나만의 잘못이 아니었듯이.
그들의 교실을 바라보는 선배교사들의 시각이 내가 신규일 때와 다르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다.
비아냥과 조롱. 내게는 그게 일상이었는데.
물론 강압적인 방식에 대해 내 편에서 내보인 거부감에 대한 반작용 같은 것이었겠지만. 그게 지독하게 상처가 됐었는데.
그때 허구헌날 울고 지냈던 동기들. 시야가 그렇게까지 좁아지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곳을 나왔을텐데. 그런 걸 보면 상당히 중증의 우울증을 앓고들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지금은. 스스로를 말려 죽이려 하지 않는다. 그 때 들인 엄청난 공과 개별화 학습 자료들에 혀를 내두를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부진은 대단한 수준이었고. 아이들을 인격적인 선에서 대한다, 폭력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강박에 가까운 신념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정말 초인적으로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새벽 4시까지 수업자료 만들고, 저녁 8시까지 애들 남겨서 가르치라고 하면 못할거다. 흠결없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했던 열의가 너무 순수하고 컸어서. 그럼에도 학습부진을 고착화시키고 심화시켜 온 학교와 학생들 가정의 경제적결핍이나 애정결핍 가득한 상황 때문에 그런 열의가 영향을 잘 발하지 못하던 것이 너무도 상처가 됐고 그래서 너무도 죽고 싶던 때였다. 원래 교대 다닐 때부터 교직에 대해서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던데다 빌어먹을 이상주의자였어서. 자기확신이 옅었던 탓에 두려움과 무기력으로 멘탈이 임용 초반부터 반쯤 나가있던 것도 있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돼. 하고 싶은 만큼 하면 돼. 부족해도 돼. 아이들의 결핍된 부분을 채우는 건 다른 선생이나..부모나..친지나..혹은 아이 스스로가 해낼 수도 있는 일이지. 모든 것이 네 일년치 돌봄으로 채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채우지 못하더라도-안타깝지만. 어떤 것은 삶의 비정한 속성 탓이지 네가 모든 걸 말아먹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느긋하다.
지금의 아이들은 그 때 아이들처럼 수업을 한 마디도 못 알아먹을 정도로 심각한 부진은 없지는 않지만 적고. 보호자들도 아이들에게 애정을 주시는 분들이 많고. 아이들 사이에도 주종관계를 연상케 할 만한 서열관계랄 것이 없는데다. 무관심했던 어른들에 대한 반감으로 욕설을 하고 물건을 던지며 폭력을 휘두를 정도로 내면의 화나 원망을 억누르다 폭발해 오는 아이도 없다. 내게 떠나간 엄마의 모습을 투사하고 부러 위악적으로 구는 아이도.. 없다.
무척. 수월하다고 할 만하다. 애정을 주면 부드럽게 답해올 줄 안다. 기대를 내보이면 발전한다. 평화롭다.
지금은 스스로의 완벽함을 굳이 좇으려 하지 않고 있다.
즐거운 학습을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함께 웃을 것을 상상한다. 찌르는 고통 없이 아이들을 일상에서 문득문득 떠올리고, 해 주고 싶은 것을 상상한다. 영화 벌새를 보고 나서, 겨울에는 아침에 막 도착해서 손이 곱은 아이들과 향이 좋은 차를 함께 나눠야지, 같은 것 말이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지 뭔가.